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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과장 Apr 16. 2016

'스토너' and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이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대학이라는 것은

대학에서 자신을 찾게 되고 대학에서 자신을 마무리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립대학교의 조교수라는 직업 때문에 대학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과 별개로 대학을 통해서 아버지처럼 가난한 농부가 되는 운명을 피해왔고, 유한 계급을 갈구했던 여인과 결혼도 하였다. 학문적으로 큰 성과를 올리지 않았고, 대학의 학과를 대표하는 학과장이 되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자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했었다.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는 것 외 인간 스토너가 겪는 여러가지 인생의 편린들이 책에서 펼쳐지만 결국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대학'이다.


이 책의 시작은 그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그가 대학을 은퇴하자 마자 삶을 마감하는 데서 책이 끝나고 있다.


대학은 스토너나 매스티스 같은 사람에게 바깥 세계를 막아주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한다. 박사학위를 받게 되면서 연구자로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으니 ‘실패자’들에게 바깥 세상을 피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는 가장 완벽한 장소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스토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농사꾼이 되었거나 아니면 기자가 되었다던지 대학보다 더 조직의 위계나 정치질을 해야하는 곳을 갔다면 그는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았을 지 모른다. 조직 생활에서 밀려났다던지, 아님 이디스라는 여인이 아닌 다른 여인과 결혼했을지 아니 못 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학이라는 곳의 설립 목적이 진리탐구라는 것에 모두들 동의하지만 언제나 그랬을까? 하는 것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유럽의 대학 중 어떤 대학들은 장인들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곳들도 있었고 반면 중세시절의 성직자들은 신의 섭리를 탐구하기 위해 순수 목적의 학문연구에 매진했었다.

미국의 대학교 설립 목적은 진리 탐구와 실용 기술을 갖춘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취지였으니 농과대학을 전공하는 학생도 의무적으로 영문학 개론 정도는 들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스토너가 공부하던 시대에(살던 시대에는 대공황 덕분에 실업자들이 즐비한 시기도 분명히 있었다.)는 청년 실업이니 실업률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기 때문에 스토너는 바깥세상 출신들의 박사과정생들과 경쟁을 충분히 하지 않고서 교수가 될 수 있었던 잇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스토너는 인생 내내 대학이라는 세계의 일원이길 원했으면서 다른 학생들의 지성을 채워주는 역할 외 바깥과 단절되고 싶어했었지만 결국 말년에는 세상과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먼저 책 초반에 나오는 슬론과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보자.

“자네는 이 폐쇄된 공간에서 이른바 세상이라는 곳으로 나가는 날을 고대하고 있나?”스토너는 당혹스러워 하면서 히죽 웃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하지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캐서린과의 불륜 관계가 끝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캐서린의 집에서 공유하는 그 일상을 더없이 사랑하고 바깥 세상으로부터 지켜내고 싶어하는 그의 심리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이 자신을 향해, 캐서린을 향해, 두 사람이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작은 방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지어 캐서린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결국 그는 끝자락에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아니 결국 그도 그 세상의 한 부분이고 필연적으로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거요. 그걸 알았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뒤로 물러나서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요”


만약 스토너가 그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레이스라는 딸은 그가 스스로 창출해낸 또 하나의 세계이며 바깥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던 통로였다.

 바깥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쉽게 포기하고 대학이라는 안전한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어린아이처럼 바깥 세상에 무지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바깥 세상을 알려줘야 하고 겪어 나가야 하는 길을 알려주는 일은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 중 하나이다.

아마 스토너는 그레이스를 통해 결국 세상과 하나라는 인식을 미리 깨닫고 다른 인생의 말로를 걸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나는 다른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라는 책이다. 그 책의 저자 역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수학을 싫어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방에 있는 한 대학교에 진학해서 석사를 마치고 대학교 박사과정을 하면서 강사를 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책에 적어놓고 있는데 이 스토너와 그를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들이 존재한다.


나는 스토너와 지방시의 주인공의 지적 역량의 차이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두 명 모두 인문학 전공자 였으며, 공부를 하는 와중에 진리를 알아간다는 기쁨을 발견하고 평생을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에 마음을 먹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전자는 테뉴어 트랙으로 들어가면서 학과장의 압박에도 자신이 마음먹은 시기에 퇴임을 했다는 것이고 후자는 지방시라는 책이 주목받으면서 불편함을 가지고 있던 지도교수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끝내 그 학교를 떠났어야 했다는 점이다.


스토너의 삶이 지방시의 삶보다 수월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스토너 역시 이디스와 불행했던 결혼생활, 딸을 자기 손으로 구제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새로운 사랑을 본인의 현실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통을 감수했던 대학의 연구자였다. 

하지만 지방시는 부모님의 의료보험이 만료되어 본인 명의 하에 넣기 위해 맥도날드에 가서 알바를 했어야 했다. 그가 투자한 대학생활의 10년 남짓한 시간은 교수 사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맥도날드가 보장해주는 의료보험도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다르지만 그래도 거의 70~90년을 사이에 두고 스토너는 어쩌면 더 행복한 시대에 살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는 최소한 바깥 세상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피난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잡았으니 말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피난처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통해 자신을 ‘개발’하던지 아니면 어디선가 침잠하고 있는 중이다. 


대학은 누군가에게는 방파제였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벗어났어야 하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11/20151211023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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