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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현 Jan 01. 2018

시간을 다루는 방법

Photography

<시간을 다루는 방법>, 2017






<시간을 다루는 방법>, 2017






<시간을 다루는 방법>, 2017






<시간을 다루는 방법> 



<시간을 다루는 방법>


‘에든버러에서 나는 시간을 아끼거나 낭비하지 않았다. 도랑 위에 쌀뜨물 버리듯 그냥 흘려보냈다. 시간이 나를 가라앉히거나 쓸어 보내지 못할 유속으로, 딱 그만큼의 힘으로 지나가게 놔뒀다.’ – 김애란, <어디로 가고싶으신가요>



평일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폰 캘린더부터 본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나. 9시부터 6시,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의 반은 근무 시간이고, 그 근무 시간은 다시 여러 분절로 쪼개진다. 주간 회의, 자료 작성, 점심 약속, 제휴처 미팅. 시간을 분절하는 습관은 시간을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는 자원처럼 느끼게 만든다. 자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껴 쓰고, 관리하려고 한다. 이 일에는 1시간이면 되겠지, 저 일에는 2시간이면 될 거야 등.


스타벅스는 매년 11월이면 17잔 커피를 마신 고객들에게 다이어리를 경품으로 주는 이벤트를 한다. 다른 좋은 물품들도 많을 텐데 굳이 다이어리를 준다. 주변 동료들은 종종 가던 다른 카페가 있어도, 그때만은 발길을 끊고 스타벅스로 향한다. 사실 누구나 한 번쯤은 분위기 좋은 카페에 혼자 앉아, 다이어리에 빼곡히 스케줄을 써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좋은 그림이다. 현대인에게 시간 관리는 일종의 미덕이자 신앙이다. 나도 그 열렬한 신도 중 하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 이탈리아 여행 준비를 하면서 엑셀을 켰다. 일정 관리는 무조건 엑셀이지. 표를 그리고, 열에는 15일을 늘어놓고, 행으로는 하루 시간을 2시간씩 나눴다. 표를 채워 넣으려고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거진 입사 후 2년 만에 처음으로 길게 가는 휴가였다. 쉬고, 머리를 비우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걸 채워 넣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라는 틀 속에 나 자신을 억지로 구겨 넣고 있었다. 만원 지하철처럼 꽉 낑겨 있는데, 무엇이 들어올 틈이 있을까. 그게 싫었다. 이번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일정은 그냥 오전과 오후로 간단히 나눴다. 꼭 하고 싶고, 보고 싶은 1가지씩만 일정에 넣었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숙소에 일찍 들어와서 초저녁부터 잔다. 느즈막히 전망 좋은 데 가서 해가 지는 걸 보고, 해가 지고 남은 불그스름한 여운이 사라지는 것도 본다. 나갈 때 차고 나간 시계를 숙소에 들어와서 손목에서 푸를 때 처음으로 본다. 사진도 이전보다는 덜 찍으려고 한다. 사진을 잘 찍고 나면 여기서 할 일은 다 했다는, 그래서 여기는 이제 떠나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더 조금만 하고, 더 욕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15일이 지나고 한국에 왔다.


만약 그렇게 흘려 보낸 시간들 때문에 못한 것들이 아쉽지 않냐고 물으면, 글쎄. 아쉬운 점도 있고, 이탈리아를 한 번 더 가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느리게, 천천히 흘려 보냈기 때문에 더 깊이 침잠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설프게 쌀뜨물을 버리다 홱 쏟아버린 쌀들처럼, 정작 내 안에 남아 있는 무언가는 더 적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캘린더엔 다시 새 일정이 한 톨 한 톨 박혀갔다. 귀신같이 시차적응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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