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도 신사(?)인 나라

by 백작가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우리나라보다 거리에서 좀처럼 경찰을 보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좀도둑이 많은(실제로 함께 연수중인 분도 도둑을 맞았다) 이 곳 상황상 경찰이 많이 눈에 띄어야 할 것 같은데 동네에 순찰 도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대부분의 집들이 개인주택이라 아파트 단지처럼 경비원도 없다. 치안을 어떻게 관리할까 궁금했었다.

런던 왕궁 앞 근위병, 영국은 공권력이 시민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권위적이지 않다. ⓒ 백작가


어느 날, 딸아이를 문화센터에 데리고 가느라 집사람과 승용차로 이동 중이었다. 경찰차와 처음 마주쳤다. 집사람이 “와~, 경찰차 처음 보네”라며 반가워했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지나쳤는데 좀 있다 보니 내 차 뒤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은가 보다 생각했다. 집사람에게 “당신이 반가워하니까 쫓아오네”라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웬걸, 문화센터 주차장까지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경찰차는 우리가 주차한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 나는 순간 헷갈렸다. ‘여기 뭐 볼 일이 있나’ 잠시 생각하고 있는 사이 경찰 두 명이 내 차 옆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것 아닌가? 문을 내리라고 하더니 면허증을 달라고 했다.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경찰이 말했다. "뒷자리에 앉은 집사람이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고, 브레이크 등 하나가 고장 났다"는 것이다. 벌금을 내야 하냐고 물으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며 브레이크 등은 바로 고치라고 했다.


결국 안전벨트 미착용을 단속하기 위해 15분가량을 뒤에서 쫓아온 것이었다. 바로 세우라고 해도 될 것을 말이다. 아마도 차에 아기가 타고 있어서 놀랄까 봐 그랬던 것 같다.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막상 외국 경찰에게 처음으로 단속을 당해보니 엄청 놀라고 긴장되었으나 “Thank you와 Sir”를 말 끝마다 달며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음날 영국인 직장 동료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니, ‘럭키 데이’란다. 원래 영국에서는 뒷좌석 안전벨트 미착용도 벌금이 100파운드나 된단다. 티켓을 안 끊었기 때문에 돈을 아낀 셈이라고.


아마도 외국인이고 처음 위반한 것이라 봐준 것 같다. 교통 위반 단속할때도 시민이 놀라지 않도록 배려하는 신사도 넘치는 모습이 영국 경찰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더 진한 추억은 그로부터 일 년여가 지난 후 생겼다. 주말을 맞아 집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콘월로 캠핑을 갔다. 캠핑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식당을 향해 차를 몰고 가던 중 교통사고가 났다.


교차로에서 과속하던 차와 충돌했다. 바퀴가 빠지고 엔진이 주저앉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나를 포함해 아이들과 집사람 모두 대형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다행히 가벼운 외상 외에 부상은 없었다.


놀라서 병원으로 달려온 한국인 이웃분께 아이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나와 아내만 짐을 찾아가기 위해 남았다. 캠핑을 온 것이라 차에 짐이 한 가득이었다. 경찰에 수소문해보니 차는 공업사에 보내졌다. 공업사로 전화했더니 이미 퇴근 후였다.


난감했다. 집에서 차로 두시간 걸리는 이곳을 다시 짐을 가지러 온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경찰서에 다시 전화 걸어 이야기하니 도와주겠다며 병원에서 기다리란다.


40분 가량 기다리니 한 중년의 경찰관이 일반 승용차를 타고 왔다. 그는 영업이 끝난 공업사에 연락해 짐을 내달라고 요청했다며 자기 차로 같이 가자고 했다.


공업사로 가던 중 경찰은 우리 집이 콘월주에서 먼 데본주 플리머스라는 걸 알고는 "집에 어떻게 갈 거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사고로 정신이 없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동안 머뭇대다가 "택시로 갈 것"이라고 대답하니 택시비가 300파운드(당시 환율로 55~60만원) 이상 나올 것이라며, 기차역까지 데려다 줄 테니 기차로 가라고 권했다.


난 "짐이 많아서 힘들 것"이라고 얘기했다. 공업사로 가서 짐을 모두 꺼내 경찰이 타고 온 차에 실었다. 트렁크와 뒷좌석까지 꽉 찼다. 경찰은 기차역으로 가자며 차를 몰았다.


'이 많은 짐을 갖고 기차에 어떻게 타나' 난감했다. 더구나 예매도 안한 상태라 남은 자리가 있을 지도 확신이 안 섰다.


경찰은 기차역을 그냥 지나쳤다. 내가 놀라며, "어디로 가는 거냐?"라고 물으니 "플리머스, 니네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감동이었다. 이국 땅의 처음 온 낯선 시골 동네에서 아이들과 함께 폐차할 정도로 큰 사고를 당해 놀랐다. 이미 해가 진 상황에 산더미같은 짐을 갖고 차로 두 시간 걸리는 집까지 가야 했다. 이 상황에서 우리 부부에게 구세주가 등장한 것이다.


컴컴해진 고속도로로 두시간여를 차를 타고 이동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는 전직 건설기술자로 중동, 미국 등 여러나라에서 일하다 8년 전에 경찰이 되었다고 했다. 원래 자기 차로 퇴근하던 길에 우리를 기차역에 태워주려고 했었단다. 딱한 우리 처지를 보자 마음을 바꿔 왕복 4시간을 운전하는 호의를 베푼 것이다.


난생 처음보는 외국인에게 베푼 영국 경찰의 호의가 너무 고마웠다. 비가 오는 가운데 밤 열시가 넘어 우리 집에 도착했다. 짐 내리는 것을 도와준 뒤 돌아간다고 인사하는 그에게 서둘러 인삼차를 선물로 건넸다. 그는 수줍은 듯 받으며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앞으로도 그 때의 고마움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찰청 사람들” 같은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영국 경찰의 모습은 어설프다. 범인을 쫓다가 개가 나오면 겁을 먹고 길을 돌아간다던지, 범인보다 더 체력이 약해서 헉헉 거린다던지 하는 일이 자주 나온다.


일단 범인을 쫓기 전에는 경찰견부터 찾는 게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경찰들의 특징이다. 왜 그런지 대부분 경찰견과 함께 범인을 추격하려고 한다.


강력범죄가 그리 많지 않아서 인지 이 프로그램에서 범인과 격투를 하거나 살인 등 중대 범죄를 해결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많은 것이 좀도둑을 잡는 것이다. 술에 심하게 취한 사람을 집에 데려다준다던지, 도로에서 위험 운전하는 사람을 단속한다던지, 대마초나 마약 소지자를 잡는 모습이 많다.


영국 경찰은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슈퍼 히어로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평범한 이웃 같은 모습이었다. 길가던 시민이 길을 물어보거나, 도움을 청하면 친절하게 응대한다.


평범하고 착한 옆 집 이웃같은 영국경찰, 시민을 위한 따뜻한 공권력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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