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상익 Mar 05. 2019

(철학,구루)『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 안에 있다

오쇼 라즈니쉬 지음 / 김현국 옮김 / 태일 출판사 / 이원종 서평



오쇼를 처음 만난 것은 '위대한 만남'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당시 한 성공학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중 '멘토 찾기'에 대한 추천도서로서 읽게 된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 책을 선정한 사람은 책을 읽어보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멘토 찾기와는 무관해 보였다. 아마도 '인생에서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라는 책 제목의 수식 문구 때문이었겠지만.


그것은 오쇼가 들려주는, 깨달음을 얻었던 20명의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철학자나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붓다, 노자, 장자, 니체,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등등이다. 그들을 오쇼의 멘토라고 부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 책을 선택한 것은 나에게 오쇼라는 선각자를 알게 하는 행운을 주었다. 그래서 그 책을 추천해준 분께 지금도 감사한다.



얼마 전 20년이 넘은 죽마고우들과 제부도에 다녀왔다. 펜션에서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워, 평소에는 하지 않던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그 기회에 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어쩌면 이들은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답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서.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평생을 함께 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걱정 없이 살만한 부를 얻는 것, ... 이런 얘기들이 오갔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좀더 근본적인 그들의 철학이 듣고 싶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걸 배운 후로부터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인생 최종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나는, 조심스럽게 '죽음'이라는 주제를 끄집어냈다. 언젠가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나의 오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친구의 충고가 돌아왔다. 역시 그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밀기에는 '죽음'이라는 것은 외면하고 덮어두고 싶은 주제인 것이다. 죽음 이후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런 말들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나는 묻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게 말처럼 되지 않을 것 같기에.


훗날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죽을 때가 됐군' 이라고 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순간이 만약 오늘이라면, 그렇게 할수 있을까? 오늘 죽는 것은 억울하고 훗날에 죽는 것은 편안할까? 그 '훗날'의 상황이 되면 지금과 달라질까? 이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의 시작이라는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일까? 삶과 죽음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우울하기만 한 것일까?  



지금껏 그 누구도 이런 질문들에 시원하게 답을 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삶의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을 사치라고도 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기도 한다. 문제는, 나에게 알려주고  때로는 믿으라고 하는 진리들을, 그들 자신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쇼는 말한다.  "스승(Master)은 그 스스로 알았고 자신이 안 것을 나누어준다. 선생(teacher)은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을 고스란히 세상에 전해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이런 의미를 따르자면 스승이라 불릴만한 사람은 아주 드물뿐만 아니라, 진정한 '선생'들도 찾기 힘들다.


나는 삶과 죽음의 의미, 존재의 이유, 혹은 그것들을 포괄하는 무언가의 의미를 깨닫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의 깨달음으로부터 알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태어난지 한참이 지나서야, 처음 인식했던 사람의 늙어가는 모습과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늙어서 죽어간다는 사실. 그 사실을 대면했을 때 받았던 충격. 그 충격이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느꼈기에. 그 후의 간절한 구도 끝에 그가 얻은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붓다 뿐 아니라 예수, 노자,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 역시 깨달은 사람들이다. 오쇼는 21살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많은 깨달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깨달음은 천재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깨달음은 우리들의 본성이라고 얘기 한다.우리들 모두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다고깨달음은 우리들의 본성이라고 얘기 한다.


오쇼는 그의 깨달음의 순간과 깨달음을 얻고 난 후의 극적인 삶의 변화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진리는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깨달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을 말로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쇼는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랐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전할 방법은 '그대들'의 언어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강연을 했고, 400권의 책을 썼다. 나는 이런 그의 노력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무엇보다 감탄하는 것은, 이 자서전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재미라는 것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오쇼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심각함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종교적인 것일수록 유머의 요소가 더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그의 장난기 가득한 유년시절과 대학시절, 강연할 때의 인터뷰 등을 읽다보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대놓고, 때로는 진지함을 가장하여 웃기기도 하는데, 단순한 웃음을 넘어 그의 문장은 통쾌함을 안겨준다. 그래서 읽으면 기분이 좋다.  


하나의 고민이 생긴다. 오쇼는 우리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성공학 같은 것은 공부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는 스스로를 '부자들의 스승'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가진 자만이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때부터 종교적이 될수 있고, 신에 대한 추구가 시작된다고 했다. 가난한 자에게는 오직 빵이 필요할 뿐이다. 그는 종교를 최후의 사치품이라 부른다. 나는 그의 말이 반어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가 대학 전공을 철학으로 선택하면서 기술자나 의사가 아닌 방랑자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능력이 없어서 삼류인간으로 전락한 방랑자들은 낙오자일 뿐이다. 나는 먼저 완전히 성공하고 나서 그 모든 성공을 차 버리고 교육받은 방랑자가 되겠다."라는 뜻을 아버지에게 밝혔다. 그는 결코 우리가 세상에서 누려야 하는 것들에 대해 제한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욕이나 자학 같은 것을 혐오했다.



나는 제대로 명상을 해보거나, 그 이외의 영적인 체험을 해본 적은 없지만 오쇼의 삶과 메세지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바람이자 나의 소망이기도 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언어를 써서라도 전달하고자 한 그 노력의 흔적들을 더 읽어봐야겠다.


무력한 아이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할아버지는 유혹당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가장 큰 유혹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대는 가르치기 시작한다.  - 35p




글쓴이 : 이원종

저자이자 독서경영 전문가로 활동 중인 이원종님은 중앙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지리더 독서경영 연구소 대표와 오간지프로덕션 북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명지대, 한성대, 오비맥주,인천/안산 CEO아카데미 등 주요 기업체 특강 등을 통해 ‘책만이 살 길이다’, ‘독서경영을 바탕으로 한 성공의 길’ 등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주)세계화전연구소 성공칼럼니스트, YES24 스타 블로거


오간지프로덕션 콘텐츠「강연의 시대」바로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끈기의 기술』이시다 준 지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