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있는 동안은 매일 사진을 찍었다. 첫 번째로는 평범한 파리의 거리를 담았고, 두 번째로는 스치듯 지나간 사람들을 담았으며, 마지막으로는 왜인지 아련하게만 느껴지는 그 겨울의 공기를 담았다. 몇 년간 여행을 다니면서 그렇지 않았던 날이 며칠이나 되겠느냐마는, 파리에서의 셔터 버튼은 분명 평소보다 조금 더 바쁘게 딸깍거렸다. 어느 날은 주머니에 남은 돈을 전부 털어 T-Max400 필름을 두 상자나 사기도 했으니, 그 시절 사진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때와 견주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던 모양이다.
뭐에 홀린 듯 무작정 찍어댄 지도 며칠이나 지난 1월 26일. 그날은 잊으려야 절대 잊을 수 없는, 두 뺨이 아릴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브뤼셀로 가는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옷가지를 큰 배낭에 대충 쑤셔 넣고, 필름 통과 메모리카드를 한데 모아 차곡차곡 작은 배낭에 집어넣었다.매일 아침 쿵쾅거리던 위층의 여행자들은나에게 마지막 사과라도 건네는 건지, 오늘만큼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락커에 쌓아둔 책 몇 권을 아나스타샤 머리맡에 올려두고, 이름 모를 스페인 아저씨가 탐내 하던 빨랫줄을 작은 메모와 함께 그의 침대에 걸어두었다.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정도의 싸구려 이별이 항상 겉을 맴도는 우리에게 적당히 알맞다. 짐을 다 싸고 나와서호스텔 직원과 늑장을 부리다 시계를 올려다봤다. 버스 체크인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남짓이다. 서둘러밖으로 뛰어나갔다. 파리 북역까지는 걸어서 20분이 걸린다.
역 근처에서도 몇 차례 헤매는 바람에 10분 정도 늦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게으른 버스 회사 직원들 덕분에 다행히 버스를 놓치지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짐칸에 큰 배낭을 싣고 버스에 올라탔다. 작은 배낭은 꼭 끌어안은 채로 있었다. 교외를 가로지르는 버스의 창밖으로 아찔한 풍경이 펼쳐졌다. 한 도시가 이 정도로 아름답기도 어려운 일이다. 마음을 느즈러뜨리는 풍경 때문인지 점점 몸에 힘이 풀렸고, 배낭의 까슬한 촉감을 마지막으로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4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브뤼셀 중앙역에 다 왔다며 잠든 사람들을 깨웠다.버스에서 내려서 처음 들이마신 브뤼셀의 공기는 유난히도 쓸쓸했다. 쌀쌀하지도 차갑지도 않았으며 하늘에 잔뜩 끼어있는 비구름만이 회색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짐칸으로 기어들어가 구석에 박혀있는 큰 배낭을 꺼냈다. 길 건너편에 호가든 깃발을 잔뜩 달아놓은 펍이 하나 보였다. 지금부터는 브뤼셀의 시간이다.
어딘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별의 끝자락에서 허전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축축한 공기를 맞으며 새 숙소를 향해 걸었다. 그 근처에 다 와서는 작은 건물 두어 채를 사이에 두고 어지간히 헤매고 나서야 입구를 찾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새로운 여행의 시작치고 꽤 괜찮은 편이다. 친절한 주인아저씨와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체크인을 하고, 널찍한 8인 도미토리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다들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했는지 방은 텅 비어있었다. 닳을 대로 닳은 철제 사다리를 밟고 2층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삐걱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가방을 멘 남자 한 명이 멀뚱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장발을 한 내 또래의 여행자였는데 그 뒷모습이 낯익어 쉽사리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파리에서 저녁 시간마다 마주친 한 남자의 모습과 참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아마 10번째 필름롤 어딘가에 들어있을 것이다.
순간 눈앞이 번쩍 빛났고, 그 빛에 놀라 황급히 일어나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의 사진, 그리고 파리에서의 모든 사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작은 배낭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루의 시작부터 기억을 훑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올 때는 분명 배낭을 메고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도 배낭은 내 품에 꼭 안겨져 있었으며, 버스에 타서도 마찬가지였다. 버스가 출발한 이후부터의 기억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브뤼셀에 도착해서는 계속해서 허전한 마음을 안고 있었으니 가방이 사라진 것은 분명 버스 안이었다.
버스회사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가 수차례 양쪽 귓가를 관통했다.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었다. 내 속이 완전히 타버리고 나서야 반가운 영어가 들렸다. 허겁지겁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죽는소리 몇 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너무나도 싸늘했다. "그 버스에서 발견된 분실물은 없어. 아마 누가 가지고 갔나 봐."
손이 벌벌 떨리며 짜증이 밀려왔다. 작은 배낭 하나 간수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고, 짜증을 내본들 그 화살은 전적으로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짜증났다. 짜증이 어느 정도 가신 다음에는 화가 치밀었다. 그 비싼 메모리와 필름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그나마 견딜만했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사진을 아직 확인도 못 해봤다는 분함은 목이 메다 못해 숨을 멎게 할 정도였다.
며칠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심지어는 배도 고프지 않았다. 내가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브뤼셀에서 반쯤 죽은 채로 그냥 시간을 흘렸으며, 벨기에 여행이 끝나고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행이 끝난 지 3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일을 자주 떠올린다. '내가 왜 그랬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같은 진부한 미련 섞인 후회와 함께. 하지만 그 후회의 끝이 내가 배낭을 잃어버린 한순간의 잘못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았다. 그까짓 배낭쯤이야 정신을 놓고 살다 보면 몇 번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 내가 정말 후회하는 것은, 아직도 밤잠을 설쳐가면서 눈을 질끈 감는 이유는 바로 '왜 뷰파인더 안으로만 세상을 보려 했나'였다. 여행이 끝나고 나에게 남은 기억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배낭을 잃어버린 것과 그 후의 여행이 무척이나 생기 없었다는 것 정도. 심지어는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온 아나스타샤의 이름 말고는 단 한 가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뷰파인더로만 세상을 담아두려 애썼기 때문이다.
영원히 남는 사진은 없다. 작년에 찍은 사진을 넣어둔 하드디스크는 올해 용량이 10gb가 넘게 줄어들었고, 옛날에 찍은 사진을 찾아보려 오래된 컴퓨터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매달 돈을 내면서 구글 드라이브에 사진을 업로드하면 그 시기를 조금 늦출 수는 있겠다. 사진을 인화해서 철저히 관리한다면 그 시기를 조금 더 늦출 수는 있겠다. 하지만 클라우드 서비스가 종료한다면, 인화한 사진의 색이 조금씩 바래고 있다면. 어쨌거나 사진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기억이 사진을 대체할 만한 완벽한 기록의 수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소한 기억은 사소해서 사라지고, 끔찍한 기억은 끔찍해서 사라진다. 하지만 소중했던 그때의 냄새와 소리와 분위기 그리고 감정. 사진에는 그것을 온전히 남길 수가 없다. 게다가 기억은 되뇌면 되뇔수록 열화가 일어나지 않고 더욱 진해지기까지 한다. 소중한 기억은 소중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기억이 끝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기 전에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사진에만 담지는 않았는지, 사진에 눈이 멀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조금은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