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방안에 가득 들어찼다. 나는 까슬까슬한 이불의 촉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주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공기는 가볍고 분위기는 산듯해서 정신이 저절로 차려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칫솔만 덜렁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문턱을 넘어 축축한 화장실 바닥을 밟는 순간, 지난밤의 기억이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와서는 찬찬히 방 안을 살폈다. 건너편 침대 2층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 듯했고, 페르난데스의 옆을 지날 때는 고약한 맥주 냄새가 진동했다. 캐비닛의 문을 열어젖히고, 카메라와 지폐 몇 장을 꺼내 손에 쥐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엘레나는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Breakfast with me?" 그때 페르난데스도 뒤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못해도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체념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베를린의 주말 아침은 생각보다 분주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주했던 것은 내 양옆에 있는 두 스페인 사람들의 입이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언쟁을 벌였다. 주제는 다양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무엇인가?'부터, '이번 시즌 라리가의 우승팀은 어디일까?'까지. 쉬지 않고 쏟아지는 질문과 편 가르기는 나를 지치게 했다. 빵을 씹고 있는데도 빵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나는 분명 독일에 왔는데 독일어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완벽할 수도 있는 오늘 하루를 이렇게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급한 전화가 걸려온 척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길 건너편에는 베를린 TV 타워가 높다랗게 서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제 막 베를린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향해 걸었다. 베를린에서의 아침은 꼭 문 앞 광장에서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서 광장은 유난히도 빛났다. 평일에 주로 보이던 정장 차림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고, 편안한 차림의 가족들이 편안한 얼굴로 편안하게 문 앞을 거닐고 있었다. 마부는 오늘 출근하지 않은 듯했다. 매일 말 한 번 타라며 치근덕거리던 그가 어지간히 짜증 났었는데, 보이지 않으니 또 허전하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천천히 문을 지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향해 걸었다. 저 멀리에는 라이히슈타크의 유리 돔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리 돔은 깜깜한 저녁, 환한 빛을 내뿜을 때가 더 멋있는 것 같다.
옅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 사이에 서자, 작은 소음도 비명이 되어 귓속으로 들어왔다. 높은 벽은 성인 남자의 키를 훌쩍 넘는 듯했다. 벽을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에게 그 정도 용기는 없었다. 높이만 다른 2,711개의 콘크리트판은 거대한 비석과 같은 느낌을 줬다. 숨이 턱 막혔다. 이런 거대한 추모공원이 베를린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끊임없이 되뇌며 반성하는 그들의 모습이 약간은 부럽기도 했다.
서둘러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와 적당히 깨끗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베를린은 호객꾼이 적어서 그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일기를 쓰기 위해 가방을 열고 묵직한 노트와 펜 하나를 꺼냈다. 아직 2시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숙소로 돌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이니 미리 일기를 적어두는 것도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적당히 빈 페이지를 찾아 오늘 날씨를 적고 지금의 느낌을 적당히 써 내려갔다. 여정은 따로 적지 않는 편이다. 사진을 뒤적이면 대충 기억이 나기도 하고, 특별히 기록할만한 그럴싸한 일정이 보통은 없다.
2018년 모월 모일.
덥지는 않고 춥지도 않은 평범한 날씨. 비는 오지 않을 듯.
오래간만에 따뜻했고, 페르난데스와 엘레나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마부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도 마음이 꽤나 헛헛한 것을 보니, 적당한 짜증은 완벽한 하루의 필수요소인 듯하다.
웅장한 회색 벽 아래서 오늘도 잔뜩 주눅들고 말았다. 날씨는 맑았는데 그 안에만 들어가면 유난히도 어둡다. 높은 벽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의 벽 때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치부 몇 개쯤은 당당히 드러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로 인해 따라올 여파는 계산해보기 전이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이 글을 적는 순간, 누군가 꽃 한 다발을 벽 위에 올렸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다.
내일은 저 벽돌들의 수를 직접 세봐야겠다. 진짜 2,000개가 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딱히 할 일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