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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Jul 14. 2020

여행뽕과 추억 보정.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모든 여행의 기억.

모든 기억이 아름다웠다.


지린내 나는 파리의 지하철도,

살갗이 녹아내리는 방콕의 더위도,

바닥이 똥으로 그득한 바라나시의 골목길도.


그곳에서 맞은 바람은 눈 앞이 아른거릴 만큼 몽환적이었으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심장의 뜀박질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네가 있기도 했으니, 여태껏 내가 떠난 여행이 '나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욕심이 많아요.'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겠다.




그때로 돌아가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도-모든 여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소매치기에게 모든 짐을 도둑맞았다가 간신히 되찾은 적도 있었고, 거리의 약쟁이들과 동침했던 날도 있었다. 이것이 내가 겪은 시련의 전부이면 여간 좋으련만, 이것 외에도 평화로운 여행에 제동을 거는 일들은 한둘이 아녔다. 찢어지게 궁핍했고 질하기도 했던 그때 내 여행에 감정을 배제한 사실만으로 점수를 매기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낙제점을 주겠다.


하지만 앞서 적은 '나쁜' 일들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억이 아름답고 찬란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흔히들 '여행뽕'이라고 부르는 여행의 마력과 단순하다 못해 투명한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추억 보정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필로폰보다는 여행뽕.

여행뽕은 필로폰보다 더 강력하단다. 내가 느낀 것은 아니고 쓰레기봉투 하나만을 들고 온 지구를 쏘다니는 부랑자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독일인 루카스는 수년간 필로폰 금단증상으로 고생하다가 쉰이라는 나이에 세계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나는 그의 여행이 일곱 해 하고도 서너 달쯤이 지난날 그를 아유타야에서 만났다.


아무 의미 없는 여행자들 사이의 대화가 오가던 도중 필로폰 이야기가 나오자, 내가 그에게 한국에만 존재하는 여행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메스암페타민보다는 트래블암페타민이 더 강력한 것 같아. 지금 나를 봐. 마약은 끊은 지 오래지만, 아직도 여행에 빠져 살잖아."

.


마약보다 더 강력한 중독성에 이끌려 전 세계를 오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알겠듯, 여행의 끌림은 정말 강력하다.

게다가 여행이 주는 환각 역시 필로폰에 못지않으니, 여행보다 강한 마약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 것이다.


집 근처에서 일어났다면 아무 감흥 없이 지나갈 만한 사소한 우연들이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그리고 그 강한 끌림에 이끌려 몇 년이고 방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뽕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떨까.

여행을 떠나면 누구나 사랑에 빠진다. 그 대상이 사람일지 사물 일지 혹은 그 도시 전체일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분명 사랑에 빠지고 만다. 감정에 극도로 예민한 사랑이, 감정의 극한으로 내몰린 여행을 만나 쉽사리 불을 붙는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숱한 여행을 반복한 사람에게 이러한 사랑은 그리 달갑지 않게 다가올 수도 있다. 우리는 여행뽕으로 덧칠된 사랑을 너무나 많이 맛봤고, 그 끝이 좋았던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감정적으로 단단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여행의 끝에는 결국 이별이 있고, 그 이별을 거듭하면 사람은 누구나 단단해질 테니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렇게 찾아온 사랑을 많이도 모른척했다.

여행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에 빠지는 것, 혹은 감정적으로 예민해지는 것 점점 죄악시되었고, 나는 그것들을 일부러 피했다.

결말이 안 좋을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 때문이다.

또 그 아픔을 다시 이겨내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나 약하다는 것을 몸소 기도 했다. 


모든 것에 취약했던 나로서는 지금 생각해봐도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결코 이성적인 최선을 택하지 않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꽤 씁쓸한 일 임에는 틀림없다.




여행뽕에 한껏 취했으면.


내 여행의 끝에 남은 것은 엄청난 깨달음이나 성취가 아니었다.

여행이 끝난 직후에 든 생각은 오히려 '씁쓸함'이었다. 앞서 말했듯, 여행의 끝에는 단순한 이별이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끝나고 몇 달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모든 여행이 완벽했다.'라고 말한다.

쓰디쓴 이별은 결국에 아름다운 그리움이 되었고, 몇몇은 인연으로 남기도 했다. 심지어 여행 중에 생긴 상처는 여행의 아름다움을 새겨낸 완벽한 표식이 되어, 나는 그 상처가 되도록 오래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쩌면 여행은 우리 인생에서 쉽게 찾아오지 않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여행이 단순한 고행으로 인식되지 않은 시점부터 그것은 유희와 오락의 한 부분이 되기도 했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간혹 깨달음을 찾기도 한다. 재미와 깨달음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일 혹은 취미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모든 여행은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아주 심하게 왜곡되어 보정된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그러니 여행뽕에 한껏 취했으면 한다.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의 마음은 절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래의 의도대로 홧김에 떠밀려 여행을 즐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여행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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