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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Sep 21. 2020

선택과 포기,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느린 사람

너무 느렸다.

지난주,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를 만났다. 갑자기 연락을 끊고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애써 모르는 척을 했는데, 그녀가 먼저 내게 아는 척을 했다. 한동안 서로의 근황을 살피는 어색한 대화가 오갔다. 나는 솔직히 지금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여기저기 떠도는 중이라고 말했고, 그녀는 작년에 공무원 시험에 붙어서 지금은 주민센터로 출근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왜?"라고 물었다. 그림을 그리던 그녀의 옛 모습과 평범한 직장인이 된 지금의 모습이 괴리가 있어서였다. 순간 말실수를 한 것 같아서 아차 싶었지만, 그 반응이 내 진심인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또 한 번 어색한 시간이 흘렀고,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뗐다. "선택을 한 것쯤으로 쳐야겠지. 솔직히 막막했고, 집안 사정도 어려웠거든." 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기차가 멈춰 섰다. 거기서 내려야 했는데, 내리지 않았다. 그녀와 꼭 붙어서 조용한 역사를 걷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 묵직한 공기와 분위기를 나는 참아낼 수 없다. 나를 태운 기차는 한참을 더 달려서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외딴 시골 역에 멈췄다. 당연히 우리 집으로 바로 가는 대중교통편은 없었다. 그렇다고 택시를 잡아타지도 않았다. 나는 이것도 여행이라면 여행이니까 낯선 동네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역무원에게 물어서 가장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전형적인 시골 여관방 느낌이었다. 이불에서는 냄새가 났고, 전등은 이따금 깜빡였다. 짐이랄 것도 없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누렇게 변색된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대로 정겹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대충 겉옷만 챙겨밖으로 나갔다. 역 앞 벤치에 앉아 가만히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들렸다. 아까 기차에서 만난 그녀의 메시지였다. 간, 중력이 강해진 듯 몸이 바닥으로 쏠렸다. 그녀가 삭막하게 변한 것이, 꿈을 포기한 것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나에게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왔는데 애써 모른척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선택을 한다. 꿈꾸던 삶을 위해, 혹은 그 반대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이야기다. 그녀도 선택했고, 방금 나를 지나쳐간 어떤 사람도 선택했으며, 심지어는 우리 부모님도 항상 무언가를 선택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는 과정에서 꽤 많은 것들을 잃었다. 다 자란 사람들이 선택하며 사는 동안, 투정만 부렸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잠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게 중에 포기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다 가지려고 애썼 것이다.


강한 중력을 간신히 버티며 처음 보는 동네를 걸었다. 바람이 찼고, 모든 것이 낯설어서 더 여행이었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면 이런 느낌이라 상상하며 비좁은 모텔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서는 수첩을 펴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뒤따르는 포기를 견딜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적었다. 아니, 적으려 애썼다. 하지만 하얀 종이 위에서 펜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포기하기에는 다 너무 귀한 것들이라 다시 수첩을 닫았다. 어설프게 닫힌 창문 사이로 기차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는 왜 그리도 빠른 건지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이건 모두 시간이 너무 빠른 탓이다. 조금만 느렸어도, 잠깐만 멈췄어도 나는 분명 선택했을 것이다. 기차 소리가 잠시 멎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건 내가 느린 탓이다. 모두가 선택을 하는데, 나만 우물쭈물 망설였던 것은 분명 내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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