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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r 25. 2022

아끼고 사랑하다

인(仁)과 비거니즘

“인(仁)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느끼는 것은, 사사로움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인이란 우리 시대의 가치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자공과 공자가 현대에 있다면 재화를 불리는 재주를 가진 자공이 현대의 인재이고, 재화를 멀리하고 인을 숭상하는 공자는 현실에서 도태된 인물일 것입니다. 현대에서 인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인을 멸시하는 것은 현명한 길이 되었습니다. 타인에게 가닿기, 다른 이들을 향한 연대는 순진함이자 걸림돌이라고들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란, ‘밥그릇 싸움’으로 대표되는 사사로움을 향해 약자들이 각자 투쟁하는 길뿐일까요? 사사로움은 쉽고 강력합니다. 사랑과 공감은 어렵고 취약합니다. ‘타인을 위하는 길이 더 옳다’는 명분만으로 사람들이 사익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자왈 맹자왈’이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 우리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익보다 인을 택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폭력과 맞서 싸우면서도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인(仁)’이 우리의 시대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에 대한 내용을 배운 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질문을 했다고 한다. 공자 철학의 목적지인 ‘인(仁)’은 사적 자기가 없는 상태이자 남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다. 남을 위해 사사로운 욕망과 이익을 뒤로 할 수 있는 마음이다. 누군가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은 위선 내지는 자기만족이라 할 거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인을 멸시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들 한다. 그것을 알기에 인의 추구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나름의 인을 추구하며 살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 시대의 인으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비거니즘이었다.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길은 계속해서 욕망과의 충돌을 일으킨다. 맛있다고 생각했던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 예민하고 불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욕망, 피곤하지 않게 살고 싶은 욕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거니즘이라는 명명이 있기도 전부터 살생한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물을 위해서. 하등하다고 멸시받는 이들을 위해서. 


현대에서 인의 실천이 어려운 것은 무관한 영역을 완벽하게 무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딱히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일평생 마주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러나 한 순간의 목격이라도, 짧게나마 연결되는 순간이라도 있다면, ‘상관없는 것들’이 끝까지 상관없을 수 있을까. 공장식 축산이 아니라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이 직접 칼을 들고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얻는 시스템이었다면, 지금처럼 많은 양의 고기가 소비될까? 논비건은 공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어서 논비건이 아니다. 사회가 의도적으로 가려둔 영역이 있을 뿐이다. 장막을 걷고 숨을 쉬는 생명을 목격한다면, 나와 ‘상관없는 것들’로부터 어떠한 동일성을 느낀다면. 공장식 축산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비건이 되지는 않지만 ‘고기’를 보는 감상이 이전과 동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윤리적 채식이 느리더라도 꾸준히 확산될 수 있다고 믿는다. 냉소적으로 손을 놓고 있는 동안 나아지는 것은 없다. 더 많은 존재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희미하게나마 기대를 걸고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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