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양철학의 관계는 일방적인 짝사랑이다. 어디가서 동양철학을 좋아한다고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완전한 비전공자이며 철학 강의는 이제 고작 4개째 수강하고 있을 뿐이라고 구구절절한 전제를 붙인다. 이런 내가 감히, 동양철학을 주제로 글을 써서 공유해도 되는건지. 철학과 학생들에게도 호불호가 갈리는 동양철학에 어쩌다 이렇게 걸어들어가게 되었더라.
2년 전 학부 마지막 학기,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남는 학점을 굳이 철학과 전공으로 채웠다. 원래는 서양철학을 수강하려 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사회의 불평등을 정교하게 비판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기존 지식으로는 논의의 일정 한계선을 지나면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옳기 때문에라는 결론에서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옳은 것은 왜 옳은지, 정말 옳은지, 애초에 옳다는 것은 무엇인지 설득력 있게 말하려면 현대사회의 기저가 되는 인식론을 알아야했고, 기존 패러다임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비판적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수강하고 싶었던 서양현대철학과 니체현대철학은 해당 학기에 개설이 되지 않거나 주전공과 시간이 겹쳤다. 시간이 맞는 강의를 찾아헤매다가 주워담은 강의가 동양철학입문과 불교철학이었다. (여기에 서양고대철학을 더하여 15학점 공학 전공과 9학점 철학 전공이라는 패기로운 마지막 학기가 완성되었다.) 동양철학의 베이스가 과장없이 0이었던 내가 동양철학에 빠진 것은 전적으로 입문강의 교수님의 덕이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은 심층 영역에서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전제로 한다. 교수님은 말도 안되는 듯한 이 문장을 수강생들이 납득하도록 첫 시간부터 몇 번이고 설명하셨고, 신기하게도 강의의 중반을 지날 때쯤에는 만물일체를 자연스레 전제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성선설이 어떻게 가능하냐며 코웃음치던 내가 성선설을 지지하게 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강의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교수님은 동양철학이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임을 강조하셨다.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넓히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철학'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배움을 가지고 어떻게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꾸려나갈 것인가. 먹먹한 마음으로 기말고사의 답지를 제출하며 최소한의 방향은 알 수 있었다. 내 삶이 사랑을 향하도록 두자.
이전까지는 대부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감정을 서술할 때도 기저에는 미움이 있었다. 내가 밉거나 사람들이 미웠다.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봤고, 때로는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한데 순진도 하지. 동양철학을 통해 인류애가 넘치게 된 건 아니다.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만, 최소한 함부로 단정짓고 미워하지 않으려 한번 더 생각한다. 미워하던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사람이 미워질 때면 서(恕), 역지사지의 마음을 떠올린다. 나는 그리 다른 인간일까. 나를 화나게 하는 저 사람들이 정말 온전한 악인인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의보다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냉정함이나 이익이 칭송받는 세상이다. 나는 냉정하고 이익을 잘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더 똑똑하고 논리적이라는 뿌듯함은 강력했다. 그렇지만 몇천 년에 걸쳐 내려온 사랑과 공감의 기록을 읽고 있자면, 정의로운 척 신나게 타인을 미워했던 기록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지금은 2년 만에 동양철학을 다시 수강하고 있다. 학부 마지막 학기의 미친 짓이 철학 3전공이었다면 석사 수료학기의 미친 짓은 대학원 강의인 한국유가철학의 수강이다. 정약용의 <맹자> 주석본인 <맹자요의>를 한 학기 동안 수업한다. 몇 번 수업을 들어본 결과 쉽지는 않겠지만 후회도 없을 것 같다. 한동안 정체되어있던 철학의 지평이 다시 넓어질 생각에 가슴이 뛴다. 철학 이론을 써야 한다면 나같은 병아리가 펜을 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질리도록 들여다보고 검토한 다음에야 학문에 대해 쓸 만한 자격을 얻는다. 아이러니하지만-지도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질리도록 들여다본 주전공에서는 앎의 기쁨과 멀어진지 꽤 됐다. 그러니 인의예지니 사단이니 성인이니 하는 개념들이 권태로워지기 전에, 새롭게 배우는 기쁨에 대해 쓰려면 걸음마를 하는 지금 '감히'를 무릅쓰고 써야하지 않겠나. 미숙하고 모호하고 때로는 섣부를 것이다. 그래도 쓴다. 세계가 팽창하는 지금을 포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