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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r 25. 2022

작위의 부끄러움

인(仁)을 생각하는가

인(仁)을 생각하다(想). 어감으로 보나 의미로 보나 상인(想仁)이라는 필명은 참 잘 지었다 싶은데, 때때로 급격하게 부끄러워진다. 인(仁)이 얼마나 거대한 개념인지 느껴질 때 그렇다. 인이 무엇인가를 논한 저작은 공자 시대부터 헤아리면 수만 권에 이르지 않을까. 공자가 말한 인의 가장 기본적 의미는 애인(愛人),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맹자>에서는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자 모든 인간의 본성. 주희의 주석에서는 천지만물을 낳고 살리는 근본. 고작 마음 주제에 주석가들의 주석을 보면 볼수록 스케일이 커진다. 유가철학의 정신적 경지인 성인도 인을 체화한 사람이다. 인이 본성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논쟁이 따르지만, 결국 유가철학에서 인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상인이라는 필명은 마치, 비유하자면 불교 신자가 '해탈의 경지'로 필명을 설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심지어 나는 철학 전공자 근처에도 못 간다. 상인이라는 필명을 쓴지도 1년이 넘었는데 '인을 생각한다'는 번드르르한 이름값을 과연 하고 있는가. 작년 이맘때쯤 서간문을 쓰며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꼈더랬다.


***

제가 마지막 편지에 넣으려 구상하던 또 다른 내용은 ‘도道’에 대한 내용입니다. ‘도를 아십니까’로 이미지가 변질하였지만 노자의 ‘도’입니다. 배경은 몇 주 전 찾아낸 네이버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입니다. 특히 동양철학에 기반을 둔 주제의식이 등장해서 흥미로웠습니다. 분명 노자를 배울 때 무위無爲의 추구를 핵심으로 정리해두었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웹툰에서 다시 노자의 도를 읽으니 새롭게 느껴지는 면이 있어 기록해두었습니다. 여기서 평소처럼 말을 이어가면 또 제 할 말만 하는 투머치토커가 고개를 들겠지요. 진짜 하려던 말은, 제가 몇 주 전에 편지에 쓰려고 메모해두었던 내용이 위의 반성문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메모를 할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도, 일심, 절대자와 같은 거창한 영역을 잠시 접어두고, ‘무위無爲’의 추구란 결국 이루고자 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담는 언어에 집착할수록 멀어짐을 말한다. 가치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곳에서 파생된 언어와 형식과 가시적인 성과들에 얽매이지 않았나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삶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마치 교육과정을 수료하듯이 어떤 행위를 하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되돌아봤을 때 맞는 길을 걸었다고 느끼는 것이지, 수많은 길 앞에 맞는 길을 따지려 애쓰지 말자. 그럴수록 틀린 길에 현혹되기 쉽다. 유학에서는 성인聖人이 스스로 성인인 줄 알면 성인이 아니다. 인仁은 인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그냥 나도 모르게 행동하는 것. ‘나는 지금 인을 행하고 있어’, 이런 자각이 없다. 정의와 평등, 인을 삶의 큰 가치로 삼았으나 껍데기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결국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여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좇으면 좇을수록 오히려 멀어진다는 아이러니입니다. 저는 타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겠다, 위로하는 글을 쓰겠다 거만하게 말했으나 그 목표를 떠올리며 무언가를 더하면 더할수록 본래 목적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장하지 않은 솔직한 제 모습을 보내겠다’는 호언장담이 장렬하게 실패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작위적인 언어는 반드시 읽는 이에게 느껴지는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때로는 의식하고 때로는 의식하지 않으며 붙인 살이 포근 님께는 결국 ‘상인을 말하는 상인’만 남는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여,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 편지가 편지로서 미흡했던 것도 진실이고, 동시에 저도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이 행복했으며, 포근 님을 걱정하고 궁금해하며 건넸던 말들은 순도 높은 진심이라는 겁니다.      


(<마침표를 다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2021), pp.415-416 발췌. 상인 외 15인, 낸다)


***

작년의 나는 제법 기특한 결심을 했다만 여전히 나는 껍데기에 혹하고 껍데기를 꾸미려 급급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시간보다 미워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보면 얼마나 가소로워보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작위(作爲)가 부끄럽다면서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불인(不仁)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만큼 모순이 없겠다는 사고에 이르렀다. 내가 만난 동양철학 교수님들을 떠올려보면 필명의 의미를 가소로워하기보다는 좋은 뜻을 담았다며 응원해주실 것 같았다. 애초에 '인을 얻었다' 혹은 '인을 안다'가 아니라 '인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유부터가 아직 인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미움이 너무 쉬웠고, 더는 쉽게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상인이라는 필명은 마치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둔 투두리스트였다. 잊지 말고 인을 생각하라고.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인을 새겨두지 않으면 사랑하는 법은 너무 쉽게 잊혀졌다. 허울뿐인 이름이었다는 반성조차 상인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러니 인을 끊임없이 내 앞의 의무로 불러오는 매개로서, 필명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다. 앞으로 아무리 동양철학을 공부한다 해도 인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위의 상태에서 인을 실천할 날은 더 높은 확률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계속 인을 찾겠다며 허공을 휘적거릴 것이다. 인을 더 치열하게 생각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면서 계속 찾아가면 된다. 부끄럽지 않은 날이야말로 상인이라는 이름을 버려야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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