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인 May 17. 2022

여전히 자랑인 네게

굳이 이렇게 보내는 생일편지

수에게.


내가 받아본 생일편지 중 가장 멀리서 날아온 편지는 작년, 보르도에서 발송된 편지였어. 너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내 생일 즈음의 네 마음을 생각하곤 했지. 익숙치 않은 풍경과 촘촘한 일정 속에서 굳이 엽서를 사고, 우체국을 찾아, 처음 부쳐보는 국제우편을 굳이 보내는 네 마음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 오글거린다는 말로 막지 않고 진심을 가득 담아보고자, '오글거리는' 글이 이상하지 않은 공간에 굳이 이렇게 편지를 남긴다.


삶의 어느 지점에 우리가 함께였음이 여전히 자랑이 되는지


작년 겨울, 보르도에서 네가 올렸던 일기의 제목이었지. 마음이 가는 문장이라서 노래를 찾아 들었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수많은 노래가사 속 하필 이 노래의 이 문장을 그때에 인용했던 네 마음 역시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려 해. 너다운 질문이라 생각해. 청춘드라마처럼 '나다운게 뭔데!'라며 어이없어할지도 몰라. 너다움을 정의할 생각은 없다만, 나다운 대답이 뭔지 네가 알듯이 그냥 아는 것뿐이야. 너와 함께했던-함께하는 시간은 여전히 나의 자랑이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라고.


앞으로의 소소한 생일편지가 밋밋하게 느껴지지는 않을런지, 한 3년치 편지에 쓸 말을 땡겨서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망설였지만, 5년쯤 뒤에 또 이런 편지 써주지 뭐. 5년이 참 짧다고 생각했어. 스물다섯의 나도 스무 살의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어리거든. 그런데 새내기였던 네가 휴학을 거쳐 마지막 학기를 앞두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5년이 새삼 길게 느껴져. 그렇지만 또, 우리가 알고지낸 시간을 말할 때 5년이라는 단어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아.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일을 하고, 일상의 대부분이 우리가 함께하는 일로 채워졌던 날들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어. 둘러싼 상황만, 안색만 보고도 네가 어떤 마음일지 짐작할 수 있었지. 지금은 너의 상황도 표정도 알 수가 없고, 매일은커녕 몇 달에 한번씩 간신히 얼굴을 보고 있어. 그래서 나는 문득, 좀더 열심히 너의 안부를 묻지 않은 지난 몇 달이 참 미안해. 네가 먼저 꺼내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냥 잘 지내겠지, 나 편할대로 생각하고 묻지 않았으니까. 정말 괜찮니, 정말 잘 지냈니,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없니.


당연하게 얼굴을 보던 날들.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아

언젠가의 생일편지에서 너는 내게 "점점 큰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때로는 가지고 있던 열정마저 사그라든다고 느껴. 그냥 적당히 모면하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시간이 많아. 눈과 귀를 닫고 근시안적인 일에 열중하다가도 가끔 부끄러워. 일단은 너는 내게 언니라 하지만 그건 나의 성숙함이나 경험이 너보다 낫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 내가 앞서있는 8개월은 아주, 아주, 사소하고 무색할 만큼 너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왔잖니?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심으로 너를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 이건 네가 성숙하고 현명한 모습을 보일 때만 조건부로 존경하겠다는 게 아니야.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야. 너를 생각하면 잔잔한 물결이 떠오르지만, 그 잔잔함이 수백번의 파도를 잠재운 결과라는 것도 알아. 우린 아직 어려. 10년, 20년, 그 이상이 지나도 어느 한 구석은 어릴 거야. 물론 너는 성숙하고 현명하고 선한 사람이지. 그런데 꼭 그렇지 않아도 돼. 물론 너는 어디서든 잘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 내가 너무 많이 한 말이라 지겨우려나? 그런데 이것도 꼭 그러지 않아도 돼. 내일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날, 언제든지 내팽겨치고 도망가. '버틸 수 없을 때'가 아냐. 너는 끝까지 버틸 테니까. 더 이상 내일이 기대되지 않을 때, 숨이 갑갑할 때, 도망쳐도 돼. 새로운 환경에 있을 내년의 네게만 하는 말은 아니고, 언제든. 나도 못하는 일인 걸 너도 알겠지만, 그래도 도망치라고 주기적으로 말해줄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잖아? 너의 손가락의 안녕을 빈다.


내가 너의 친구여서, 네가 나의 친구여서 자랑스러운 수. 오늘은 너에게 쏟아지는 이유없는 축하와 축복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를. 항상 걱정 많고 신중하고 너무 많은 후회와 기억을 지고가는 너를 위해, 나는 그저 너의 모든 선택을 낙관할게. 네가 내게 그랬듯이 너의 최선을 의심치 않을 거야.


생일 축하해.

너의 에필로그는 틀림없이 수많은 긍정의 언어로 가득할 거야.


2022.05.17.

존경과 애정을 담아,


어쩐지 필명을 쓸 수 없는

선우.


짧지 않은 나와의 기억들이
조금은 당신을 웃게 하는지
삶의 어느 지점에 우리가 함께였음이
여전히 자랑이 되는지
멋쩍은 이 모든 질문들에 '그렇다'고 대답해준다면
그것만으로 글썽이게 되는 나의 삶이란
오, 모르겠죠 어찌나 바라던 결말인지요

- 아이유, <에필로그>
매거진의 이전글 내일이 알고싶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