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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Jun 06. 2022

라비올리

큰 미련은 아니라서

7번째 할아버지의 기일이 지났다. 할아버지에 대한 단상을 쓰려고는 하는데, 감히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효와 거리가 먼 인간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있으니 나름대로 돌려드리려고는 하나, 사랑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기에는 입이 안떨어진다. 해마다 어버이날에 정성 가득한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당분간 쓸 생각이 없다. 중고등학생 때 교실에서 쓴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어릴 때 나를 키워주신 친가 쪽 조부모와의 관계는 애정이 더 있는 편이다만 효녀 노릇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주제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글이라니, 양심에  반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다.


할아버지는 보편적인 할아버지의 이미지-예를 들면 작년 돌아가신 외조부-와는 다른 분이었다. 향년 83세셨으나, 항상 아이같은 구석이 있는 분이었다. 새롭고 신기한 것이 있으면 항상 눈길을 뺏겼다. 집 앞 시장에 식당이 새로 들어오면 꼭 한 번은 방문해야 했고, 열대과일을 파는 트럭이 오면 손녀들에게 '먹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은 양송이스프와 크림파스타, 크림빵과 믹스커피였다. 나열하기만 해도 느끼함이 올라오는 이 목록을 할아버지는 별미로 즐겼다. 무엇보다 조부모는 내가 기억하는 한 한 번도 나와 언니의 성별에 불만을 표하거나 여자애가 할 일을 제한한 적이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큰 사람이 되라고만 했다. 할아버지는 내게 장기 두는 법을 가르쳐주고 산에 데려갔다. 집안일을 시킨 적도, 시집을 어떻게 가라는 말도 꺼낸 적이 없었다. 요리와 담을 쌓고 산 할아버지였지만 (결코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할머니가 집을 비우면 할아버지가 어떻게든 우리의 식사를 챙겼다. 할아버지의 장례에서 영정사진은 당연스레 언니가 들었다. 상조회사 직원들은 손녀가 영정사진을 드는 장면을 처음 본다고 말했다. 대학에 오고 나서야 모든 조부모가 이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서양식 입맛 때문인지, 유독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음식과 함께 떠오른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동네에서 유명한 파스타 가게를 할아버지와 간 적이 있다. 치즈 토마토 파스타가 6000원, 크림파스타는 7000원에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동네 중, 고, 대학생의 명소였는데, 어린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파스타를 먹는 게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중학생 때 동네에 수제 돈까스 무한리필 가게가 생겼을 때도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갔다. 당신께서는 이미 식사를 했다며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끔 조부모 댁에서 치킨을 시킬 때, 머니는 순살치킨 수입산이기 때문에 뼈 있는 치킨을 켜야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네모난 모양으로 튀긴 BBQ 순살크래커치킨이 항상 궁금했다. 나도 뼈 바르기를 귀찮아했기에 어느 날 할아버지와 뜻이 맞으면 순살치킨을 시켰다. 6천원, 7천원짜리 파스타나 돈까스. 어쩌다 한 번 치킨. 세 줄을 사와서는 나눠먹자고 하던 마요네즈를 듬뿍 넣은 참치김밥. 어른들에게 그게 얼마나 큰 금액이겠으며 자식과 손주를 잘 먹이려는 마음이 어느 조부모에게 없겠냐마는. 아무 조건이 없었던 그런 사랑의 일부가 아주 가끔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다. 조부모님 손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고등학교 진학 이후로는 명절이나 되어야 조부모 얼굴을 보았다. 그런 고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하게, 가슴이 찢어지게 슬프거나 며칠을 우울함에 빠지지는 않았다. 부고를 듣고도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부터 중환자실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 30분 이하의 면회가 최대였고, 그마저도 나는 학원 스케줄로 갈까말까 했다. 제대로 대화를 한 날은 언제가 마지막인지 더욱 까마득했기에 할아버지의 부고는 실감이 안 났다. 처음 혼수상태에 빠진 날에는 2주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담당 의사의 예상과 달리 할아버지는 깨어났고 몇 개월을 더 살았다. 그러나 기도삽관으로 말을 할수도 없었고, 뇌종양 증상으로 거동은 물론이고 필담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과연 할아버지의 마지막 몇 개월이 당신께 가치있는 덤이었을지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7번의 해가 바뀌는 동안 할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온다고 해서 딱히 추모의 시간을 가진 적은 없었다. 현충일이 다가오면 이맘때네. 그렇구나. 아마도 작년 외조부의 장례를 치르며, 우리 할아버지-나에게 우리 할아버지란 항상 친가의 할아버지였다-를 더 잘 보내야 했다고 작게 후회했기 때문에 이번 기일이 유독 걸리는 것일지도. 7년 전, 어른들은 우리에게 입관에 오지 말라고 했다. 내가 어른들이라도 그리했을 것 같다. 작년에는 입관을 들어갔다.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의 입관을 목격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뇨끼를 먹은 사진을 보다가 문득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지금껏 먹은 뇨끼가 몇 접시인데 뜬금없이. 이 역시 기일이 다가와서 그런가. 그 즈음에 할머니께 한식 코스요리를 대접해서 그런가. 할머니가 너희 할아버지는 해초류를 '안 드셔'라며 현재형으로 말해서 그런가.


트러플 크림 라비올리

고등학생 때까지 내게 파스타는 곧 스파게티였다. 라자냐가 파스타면의 일종인 것도 몰랐고, 아웃백 투움바 파스타에 나오는 넓은 면을 페투치네라 하는 것도 몰랐다. 지금이야 인스타그램에 생면 파스타 전문점이 쏟아지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다양한 면을 다루는 이탈리안 식당도 흔치 않았다. 그러니 감자로 빚은 뇨끼, 속을 넣고 만두처럼 반죽한 라비올리, 라자냐면을 둥글게 말아낸 까넬로니와 같은 파스타를 알 리가 없었다. 웬만큼 맛있어서는 이탈리안 식당이 살아남기도 어려운 지금에 할아버지가 계셨다면 다닐 곳이 많았겠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구운 뇨끼와 바질크림, 그보다는 리코타치즈로 속을 채우고 트러플오일과 양송이크림을 눅진하게 얹은 라비올리.그리고 무겁게, 파스타 한 접시에 3만원쯤 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정도는 기꺼이 내가 결제할 수 있는 지금에 당신이 계셨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한 믹스커피만을 고집했던 당신께, 고소한 에스프레소에 연유를 넣은 베트남식 커피를 알려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때 너무 몰랐고 누구를 챙길 줄은 더욱 몰랐으니까. 시간의 유한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으니까.


사후세계를 반쯤 믿는다. 알 수 없는 다음의 영역이 있을 수도 있겠거니, 추측할 뿐이다. 현세가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데 사후세계라고 보고 싶은 이들을 상봉하게 해줄 만큼 친절할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만난다면' 이라는 전제는 너무나 남겨진 이를 위한 말이다. 후회와 미련을 덜기 위한 말이다. 그러니 내게 당신을 만나서 하고 싶은 일은 풀어낼 방도가 없는 미련이다. 라비올리와 커피 정도야 고인에 대한 미련치고는 지나치게 사소하지 않나. 그리움이라기에는 너무 가볍지 않나. 아직은 짊어지는 게 맞는 듯 해서 덜지 않고 가져가기로 했다. 영원한 이별이 남기고 가는 미련이란 무엇인지. 7년이 지나서야 그 일부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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