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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Jul 11. 2022

책임 혹은 선물

살아갈, 혹은 죽지 않을 이유

  살아갈 이유와 죽지 않을 이유를 구분할 수 있을까. 삶의 이유를 열심히 풀어보려던 시기가 있었지만 한동안 멀리 밀어두었다. 대문호부터 종교, 철학, 인스타그램용 감성 에세이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잡았던 글감이라 고작 스물얼마의 나이에 논하기 부끄러웠다. 그러나 호르몬의 농간은 무섭다. 이번 PMS는 유독 심하다. 응급실에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높은 체온수치를 보고 나서야 최근의 우울감이 날뛴 이유가 납득되었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처럼 세계의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증폭되어, 더 이상 정신과 방문을 미룰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던 일주일이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살아갈 이유에 대한 의문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정신이 건강한 상태에서는 굳이 스스로에게 삶을 납득시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 삶이니 죽음이니 잡히지도 않는 의미에 관심을 끄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정상의 삶인가. 고장인지 과잉기능인지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안다.


  삶에서 출발한 사고의 흐름은 어김없이 죽음으로 흐른다. 삶은 죽음으로 흘러가는 과정이니 이상하지 않다. 아무리 살아있을 이유로 초점을 맞추어도 죽지 않을 이유만이 떠올랐다. 여러 상황도 나를 차곡차곡 짓누르고 있다. 내 손으로 풀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근본에는 성취에 대한 강박, 존재의 증명 욕구, 그 힘겨루기에서 나가떨어지며 발생한 무기력이 온통 뒤섞여있다. 보통 강박이 커질 때 무기력이 함께 날뛴다. 차라리 이 강박과 무기력의 이상한 공존이 온전히 호르몬의 영향이면 좋겠다만은, 시기가 지나면 감소하는 호르몬과 달리 이것은 내가 안고가야 할 기질이다. 그래서 나를 던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죽음이 마치 도피처와 같이 느껴질 때 나를 땅에 묶어둔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나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숨통을 막을지가 두려웠다.


먼 곳에서 내려다보다


  세계를 모래사장과 같이 인식할 때가 있었다. 모래사장에서 모래 몇 알이 사라지는 일은 대수롭지 않다. 지금은 '세계'로부터 바다를 부유하는 거대한 그물을 떠올린다. 하나의 매듭이 끊어져도 그물 전체는 멀쩡하지만 찢어진 부위는 꾸준하게 넓어진다. 파도는 단 하나의 매듭만 끊어지도록 두지 않는다. 내가 죽어야 주변인이 차라리 편하다거나, 속시원히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바람은 슬프게도 자기기만이다. 더욱 슬프게도 죽음을 한 켠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죽음과 끈질기게 싸우는 많은 이들을 보아왔다. 어쩌면 내가 만든 진동이 경계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한 쪽으로 밀어버리지 않을까. 진동은 나의 인지범위 바깥까지도 전달된다. 나의 세계를 들어내고 싶었지만 타인의 세계를 뒤흔들고 싶지는 않았다. 알고 있는 얼굴만큼 책임이 무거워졌다. 원해서 받은 삶이 아닌데 책임까지 지고 있어야 하나. 그러나 나의 세계가 아직까지 찢어지지 않은 것은 존재로써 책임을 다하는 수많은 매듭의 덕일지도 모른다.


  나의 책임감을 믿기는 하지만, 책임감이란 본래 지나치게 바르고 취약하다. '세계에 대한 책임'과 같이 거창한 단어에 앞서는 보다 강력한 생존의 전제가 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랐던 열여덟의 여름이 어김없이 끌려나온다.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데 왜 그렇게 일찍 끝내고 싶었니. 그 아이에게 묻는다면 울고 화를 낼 것이다. 지나갈 때까지 견딜 수가 없다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겁이 많았던 아이는 끝내 그 시간을 견디고 말았다. 나는 충분히 고마워해야 한다. 버텨줘서 고맙다고. 매일은 아니지만, 그때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날이 분명히 존재했다. 선물같은 날은 반드시 온다. 이것은 희미하지만 변치 않는 전제로 자리한다. 앞으로도 나는 틀림없이, 셀 수 없이 많은 나날을 내게 선물할 것이다. 이 문장에 흔들리는 닻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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