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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r 25. 2022

무능한 인간

독립영화 <귀여운 할머니> 리뷰

산다는 게 뭐가 이렇게 번거롭고도 질긴지.


먹고, 자고, 씻는다. 비인간 동물들은 먹기 위해 먹이를, 자기 위해 공간을, 씻기 위해 물가를 찾지만 현대 인간에게 모든 생존은 재화로 귀결된다. 살아있을 만큼, 즉 식사와 주거의 비용을 지불할 만큼 일하고 돈벌기란 너무 많은 조건과 시간을 요한다. 불로소득의 삶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은 불로소득의 삶을 살고싶다는 말과 별다를 것 없이 인식되는 듯 하다.


<귀여운 할머니> 포스터 (https://tumblbug.com/cutegrandmother/story)


“사람들은 저보고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것 같아요. 집주인 아줌마가 그랬어요. 저처럼 팽팽 노는 건 돼지새끼나 다름없는 거라고. 제 꿈은 귀여운 예술가 할머니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나이드는 게 두려울까요.”


영화의 시작, 월세방에서 쫓겨나 기찻길에서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자의 모습은 비참하기보다 후련하다. 질긴 생존의 굴레-재화의 굴레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일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여자는 들고 다니던 화분을 베고 스스로 땅 속에 누웠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과 끝은 한 사람의 생애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에 던져져, 고독을 견디고, 마음을 뺏기는 무언가를 만나고, 착着을 꺾으며 생을 끝낸다. 화분은 여자의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목도리를 뺏어가서 체온유지를 막고, 몇 푼 안되는 돈을 여관에 쓰게 했다. 화분이 아니었으면 여자는 며칠 더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머물 곳 없는 생존을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영화 속 여자처럼 원하는 순간에, 더 이상 세상에 아무런 착着이 없는 순간에 고통없이 삶을 끝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질긴 생존본능은 삶에 어떤 행복이 없어도 생존을 이어가게 한다.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일단 돈부터 모으고 그 다음’으로 행복을 미루라는 말은 발화자의 악의와 무관하게 어딘가 기만적이다. 돈이 있어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만, ‘다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자아실현이며 행복은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치가 된다. 금전이 부족하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글을 쓸 땐 위기가 중요하대요. 영화를 만들 때도요. 사람들은 타인의 위기를 즐기잖아요. 지금도 누군가는 즐기고 있을까요? 전 지금 죽어가고 있잖아요.”


'여성이 나이들어서도 혼자 살아가려면 재력을 갖춰야 한다' 이 문장에는 어떠한 오류도 없으며 바람직하다. 다만 이로부터 ‘재력/ 사회적 지위를 갖춘 여성이 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이라는 오독이 빈번하게 파생되었다. 여성이 더 경제력을 갖추기 어려운 현실이 있고, 여성노인의 빈곤률이 높은 현실이 있고, 여성에게 안전한 주거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이러한 현실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빈곤하지 않은 여성 되기가 종종 페미니즘의 실천으로 제시된다. 그에 따라 ‘야망이 없었기 때문에’ ‘무능했기 때문에’ 라며 가난을 개인적 차원의 업보로서 해석할 때, 여성의 일은 전문성이 없기 때문에, 출산휴가 쓰는 여성 채용은 손해이기 때문에 여성의 임금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는, 신자유주의와 여성혐오가 결합된 주장에도 반박할 수 없다. 여성혐오적 구조 내에서도 경제력을 거머쥐는 여성은 항상 있었다. 여성이 살 만한 사회란 시급이 낮은 노동을 해도, 나이가 들어도, 몸이 아파도, 보호해줄 누군가가 없어도 여성이 거리로 내몰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구조적 안전장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최근에 접한 미디어 속 가난한 여성이 <나의 아저씨> 이기 때문인가. 영화 속 여자의 가난은 감히 비난할 수 없는 가난이 아니라서 좋다. 보편적인 미디어 속 가난은 가난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고(주로 부모의 빚), 가난의 극복 이외에는 모든 개인적 욕망을 거세한 인물을 내세워 사람들은 그를 보고 오직 연민만을 느끼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여자의 주변인들은 그에게 다른 일을 뭐라도 하라며, 그렇게 팽팽 노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며 비난한다. 그런데 경제적 생산성이 정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인가. AI가 현 직업의 몇 퍼센트를 대체할 것이라는 헤드라인에는 호들갑을 떨면서, 우리가 언제든지 경제적 생산성이 없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전제는 쉽게 외면된다. 유발 하라리는 AI보다 우수한 소수의 인간을 빼고는 다 쓸모가 없어질 것이라는 냉소적 미래를 내놓았지만 굳이 AI보다 우수해야 쓸모있게 사는 것인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전통적 자본생산 기준에 따르면 아무 생산성 없는 인플루언서들은 유튜브며 인스타그램으로 수억원을 벌어들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생산성 있는 인간의 기준은 앞으로도 끝없이 전복될 것이다. ‘고용되기에 적절한 인간인가’가 쓸모의 기준이 되는 사회는 수십 년 안에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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