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베카> 리뷰
뮤지컬 <레베카>에서 글감을 얻었지만 이걸 리뷰라고 할지 단상이라고 할지 고민했다. <레베카>가 유명세에 걸맞게 넘버와 배우들, 무대구성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만 스토리는 2022년에 논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스토리에 기대를 안 한 상태였는데도 도저히 좋은 평은 못 주겠다. 사별한 전처, 레베카를 연상시키는 상황만 오면 막심은 ‘나’에게 급발진 모드가 되어 소리지르고 ‘나’는 무섭다며 울 때마다 이 커플의 끝은 당연히 파국이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사랑의 힘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결말이라니....... 원작영화가 1940년이고 배경은 그보다 더 옛날인 것을 감안은 해야겠지만, 2022년 시점에서 아무리 봐도 남주인공 막심은 어린 여자랑 재혼하고는 고생만 시키며, 힘이 되기는커녕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가정폭력범에 가깝다. 사랑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 좋은데, 왜 모든 과거의 허물을 용서해주고 무한 사랑으로 감싸안는 역할은 여자가 해야 하냐는 거다. 그것도 한참 어리다. 아무런 빽도 없는 ‘나’가 결혼 후에 가정부들에게도 무시당하며 개고생할 때는 그놈의 사랑으로 해결해줄 수 없었니?
스토리의 올드함에 대한 분노는 이쯤 하고, 쓰려던 글감은 따로 있다. 사실 극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레베카>의 진주인공은 댄버스 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인적인 고음의 메인 넘버 ‘레베카’가 댄버스의 몫이기도 하고, 다소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나’와 막심 커플에 비해 수수께끼같은 역할로 존재감을 자랑한다. 댄버스의 또다른 인기요인은 ‘사랑과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경험으로부터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댄버스는 어떻게 봐도 보편과는 거리가 먼, 광기에 가득 찬 여자다. 그러나 그 광기가 레베카를 향한 사랑과 레베카의 죽음에서 비롯되기에 매력적이다.
방마다 스며있는 음습한 이 기운
바로 그녀의 긴 그림자
레베카, 지금 어디 있든 멈출 수 없는 심장소리 들려
바람이 부르는 그 노래
레베카, 나의 레베카
어서 돌아와 여기 맨덜리로
- ‘레베카 ACT 2’
댄버스에 대해서는 레베카의 최측근이었던 댄버스가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이 되려는 ‘나’를 괴롭힌다는 정도의 정보를 알고 극을 봤다. 틀린 정보는 아니지만, 극을 볼수록 댄버스는 드 윈터 부인의 자리에 부족한 ‘나’가 못마땅한 수준이 아니라 진심으로 죽은 레베카가 살아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광기를 보여준다. 댄버스에게 레베카는 사랑이자 숭배의 대상이었고, 가장 완벽한 여성의 표상이자 인생을 바친 대상이었다.
그녀는 난초처럼 되돌아올 걸 난 알아
영원한 생명 죽음을 몰라
그녀를 굴복시킬 순 없어 그 누구도
우리 곁에서 숨을 쉬어 난 느낄 수 있어
날 불러 자신을 되살리라고
- ‘영원한 생명’
애도(mourning)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마 정신분석학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애도는 주로 사별의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애도는 애착을 가진 대상의 상실에 대한 정서반응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심지어는 본인의 신체 일부를 상실하거나 나이가 들어가는 신체를 자각할 때도 애도를 거친다. 애도는 단순히 상실에 딸린 감정이라기보다는, 빈 자리를 끌어안고도 다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이다. 적절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자아의 상실을 치유하고 정서적 평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애도의 시작은 상실의 상황을 수용하는 단계인데, 상실의 수용을 거부하는 것은 대표적인 병리적 애도반응이다. 그러니 댄버스는 단 한번도 레베카를 애도하지 못했다. 애도의 앞에 서기조차 거부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느모로 보나 악역인 댄버스에게 연민이 들었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상실하며 살아갈까.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길 테니 잃을 것도 많다. 어떤 시간, 장소, 신념, 사람, 그리고 나까지. 상실할 것을 꼽아보다가 그만두었다. 정말로 상실하는 날을 위해 우선 피했다. 어떤 상실에는 애도를 시작하지 못하고, 혹은 끝내지 못하고, 떠난 대상이 돌아오는 상상 속에 갇힐 것이다.
상실의 경험은 타인의 경험일지라도 우리에게 유한성을 자각시킨다. 영원을 간절히 바라는 대상도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기에 애틋하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지금과, 지금에 속한 많은 것들이 때때로 애틋해지는 이유는 끝없이 소멸하고 있기 때문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