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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r 26. 2022

크게 다르지 않은 당신께

새로운 세계에 화답하기

<속이 허해서 먹었어요> (2021), 윤로빈, 하모니북스


빛길님께.


안녕하세요, 상인입니다. 지난 편지에 대한 답장 겸, 빛길님의 책에 대한 감상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조금 더 여유롭고 컨디션이 좋을 때 편지를 시작할까, 잠시 유혹에 흔들리다가 다행히 시작에 성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은 많은 방해꾼을 불러오잖아요? 완벽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며 제 눈을 가리는 완벽주의를 빛길님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쁘고 날씬하고 공부 잘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콤플렉스 속에 살면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데 익숙해진다. 나는 못난 점이 많으니 다른 사람과 같은 경주에 참여해도 뒤떨어진 출발선을 가졌다며, 정신 차리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곤 했다.

p.81.


아무리 자아가 비대한 10대였어도 절대 아이돌같은 외모가 될 수 없는 건 알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완벽하고 싶었어요. 반에 한두 명씩 있는, 성적과 외모와 예체능 실력까지 갖춘 친구들을 항상 마음 속에서 부러워했습니다. 대학 가면 살 빠지고 예뻐진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으나 그건 상대평가의 순위를 올려준다는 말은 아니였습니다. 이미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모인 대학인데 예쁘고 날씬하고 성격까지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요. 내가 노력해봐야 '저렇게' 예뻐질 수는 없음을 알아서 예뻐지겠다는 목표는 일부 체념했지만 외모강박을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 못생겨지지 않으려면 그것대로 항상 노력해야 했으니까요.


얼굴이나 골격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범위가 적으니 몸이라도 날씬해야 했습니다. 건강한 사고를 가졌다면 대체 이게 무슨 인과인지 이해하지 못할 법한 문장이지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배고프면 집중을 못 하는 제게 식단관리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미션이었기에  실패만 쌓이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습니다. 무거웠던 외모강박에 대한 반발력으로, 2018년 탈코르셋이 대두될 때 투블럭 머리를 하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분명 큰 전환점이기는 했으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는 시도는 '외모 신경쓰는 건 코르셋이고 여혐이야'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없음을 시간이 더 지나고서야 알았습니다.


처음엔 다이어트에 대한 압박을 받을 때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을 때 폭식을 했는데 요즘엔 딱히 그런 일이 없어도 폭식을 하는 것 같아요. 할일이 없을 때면 지루한 시간을 채우려고 폭식을 하기도 해요. 딱히 배가 고프진 않은데 속이 허해서요.

p.72.


지금도 음식은 활력인 동시에 도피처입니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불안해서, 혹은 지루해서 폭식을 했다는 문장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저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지금 시간이 드라마틱하게 행복해질 것만 같다는 착각에 쉽게 빠지거든요. 음식을 먹는 동안은 잠시 해야 하는 일로부터 도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찾아 마주한 음식은 대체로 상상 속보다 맛있지 않고, 다시 공허함이 밀려들어 방향을 잃은 상태가 됩니다. 소화기관이 약해서 과식을 하고 난 뒤에는 몇 시간에서 며칠까지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불안한 날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간식을 잔뜩 먹고는 살이 찔까 걱정합니다. 인스타그램을 조금만 돌아다녀도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에 대한 해결책이 여럿 보이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운동을 해도 산책을 해도 목욕을 해도 그때뿐이에요. 우울과 불안을 영원히 떼어내겠다는 생각은 반쯤 접었고, 그냥 한 켠에 데리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때문에 '아직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지만' 무던히 살아가겠다는 맺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빛길님이 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시기까지 얼마나 외로운 길을 걸어오셨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책 속의 이야기를 완전한 옛일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지금의 일상을 만나게 된 것은 빛길님께서 괴로움보다 더 큰 사람이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터널같은 길을 지나온 빛길님께 진심어린 존경과 응원을 전합니다. 살면서 다시 흔들리는 날이 있을지 모르지만, 돌아와본 경험은 빛길님께 언제나 큰 힘이 될 겁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몸을 자주 씻기도 했다. 목욕을 하면 정신도 깨고 기분 전환이 된다는데 아무리 몸을 자주 씻어도 우울이 씻겨내려가지는 않았다. 되려 피부만 건조해지고 갈라질 뿐이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의 우울은 불용성인가.

p.65.
아직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평화가 찾아올 것을 믿으며 오늘도 흔들리는 이 삶을 무던히 살아가겠습니다.

p.115.


완벽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하자는 목표는 제게 머나먼 별같은....... 잘 보이고 바람직하나 잡을 수는 없는 목표로 느껴집니다. 이제 글은 제 정체성의 큰 축을 이루고 있지만 어김없이 글과의 권태기도 돌아옵니다. 찔끔찔끔 몇 문장은 떠올라도 도무지 하나의 완결된 글을 쓸 수가 없는 시기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글일수록 타인에게 보이기 싫고, 그럼 끝내지 않기를 택합니다. 제게는 시작도 어렵지만 마무리는 더 어렵습니다. 정확히는 '이미 망한 것 같은' 상황에서 완주하기를 매우 힘들어합니다. 제게 책임감이 강하게 박혀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합니다. 책임감마저 없으면 저는 매번 중도포기만 하는 사람이 되었을 거에요. '그래도 써야지'라는 결심은 제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독자(라기도 민망한 지인분들)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분들께 참 감사한 동시에, 세상에 이렇게 좋은 글이 많은데 정말 내 글에 의미가 있는걸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제 글을 통해 편지를 쓸 용기를 얻었다고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미가 없다며 무기력에 빠져들 준비를 할 때마다 빛길님의 편지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제 글이 당신께 가닿았다, 말씀해주시는 분들을 통해 시작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빛길님을 처음 만났던 이태원의 카페. 커피가 맛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나는 요즘 새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새삼 시간을 돌아보고, 새삼 세상을 돌아보고, 새삼 나를 돌아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얻어내는 새삼의 시간. 그건 겨울코트 주머니 안에서 잊고 있던 돈을 발견한 것처럼 재미있는 일이야.

p.110.


지난 편지에서 써주신 '세계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라는 표현이 참 마음에 듭니다. 저 역시 세계는 제가 아는 만큼만 존재하고, 세계를 넓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만남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세계를 내보이는 일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 용기에 화답하여 새로운 세계를 살펴보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안그래도 긍정적인 기운을 뺏어가는 현실의 문제가 많은데 '굳이' '타인의' '이런 부분'까지 보고 싶지 않을 때가 많잖아요. 선뜻 글을 공유하자 말씀해주시고, 빛길님의 책을 건네주시고, 제 글을 꼼꼼히 들여다보시는 빛길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마침표를 다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에 실린 다른 작가님들의 서간문을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일상의 기록일 뿐인 서간문의 매력이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타인이 피로의 원인이 되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빙산 아래의 무언가를 끝없이 궁금해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제 마음대로 일반화를 했습니다.


저는 빛길님의 글에서 큰 동질감을 느꼈으나 함부로 우리가 '비슷하다' 거나 '닮았다'는 표현을 쓰기는 망설여집니다. 우리의 글의 출처는 내면 깊은 곳이 맞지만, 그건 전부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모호하고 약한 범위로, 감히 확신할 수 있는 영역만큼만 표현을 축소합니다.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군요. 우리는 지난 날과 쉽게 화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계속 걸어가겠군요. 인연이 되어 기쁩니다.


2022.03.26


오늘의 '새삼'에 한 자락 더하기를 바라며


상인 드림.


지난 편지: https://brunch.co.kr/@yy0000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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