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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y 01. 2022

그래도, 사랑할 수밖에

연극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세상에게 받은 게 없다. 그래도 이 세상을 지켜야 할까. 세상이 손에 잡힐 듯한 구슬로 다가왔다. 무엇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부수고 버리면 안되려나.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국립극단 (배해률 작/이래은 연출)


플라스틱 쓰레기 선별장에서 일하는 '지혜'와 소방관 '정현', 두 여성은 함께 사는 연인이다. 넉넉치 못한 형편에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영원'까지 키운다. 청계천에 방류되어 플라스틱을 먹고 죽은 작은발톱수달의 동화는 지혜, 정현과 계속해서 오버랩된다. (수달들은 지혜, 정현 배우가 1인 2역을 한다) 사람들이 수달에게 준 것은 사육사와 한때의 좋은 기억, 그리고 버림받은 기억, 과자 부스러기, 죽음에 이르게 한 플라스틱뿐이다. 지혜는 플라스틱 선별장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세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30년 동안 플라스틱 쓰레기를 분류해왔지만 지혜에게 세상은 각박하기만 하다. 정현의 친한 동료였던 민재의 순직. 폐암으로 인한 정현의 죽음. 평생을 화재연기 속에서 살았지만 흡연자였다는 이유로 정현은 순직을 인정받지 못한다. 정현의 순직 인정을 위해 싸울 때, 끝내 지혜는 일자리를 기계에게 빼앗기고 미련 없이 플라스틱 선별장을 떠난다.


내게 남은 게 뭐지?


지혜는 절규하며 당장이라도 세상을 등질 듯 퇴장했지만 그로부터 20년을 더 산다. 70대의 노인 지혜는 죽기 전까지도 집으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들고 와서 분류했다. 지혜에게는 일자리도 정현도 없다. 영원은 지혜의 연락을 피한다. 그런데도 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작은발톱수달에게 먹일 미꾸라지를 들고 범람하는 하천으로 향한 지혜는 돌아오지 못한다. 정현이 살아있을 때는 산불 현장에서 고라니와 소를 구하려다 죽을 고비를 넘겼더랬다. 도대체 왜?


무대에 쏟아진 플라스틱 쓰레기
기계: 하루는 그 사람이 플라스틱을 아주 무서운 속도로 골라내는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혜 씨, 무슨 꿈을 꿨길래? 꿈에서 선별장과 태평양 한복판의 쓰레기 섬이 나란히 등장했대. 이쪽 선별장에서 부단히 플라스틱을 솎아내면, 저쪽 태평양의 쓰레기 섬도 줄어들었고, 어느새 그 넓은 바다가 맑고 깨끗해졌다는 거지.


지혜와 정현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세계를 지킨다. 계기도 이유도 없고 보상도 없다. 자기만족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들의 행동을 컴플렉스나 강박으로 풀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맹자에서 사랑(仁)은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원문에서는 가족)부터 만물까지 가지처럼 확장되는 것이라 한다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 (不忍人之心) 인간의 본성이기에 이 사랑은 자연스럽다. 만물은커녕 가까운 이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천에 널렸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맹자와 맹자를 연구한 유학자들은 가능성을 믿었다. 맹자의 성선설은 흔히 해석되는 것처럼 '나쁜 사람들도 알고보면 착하다'는 순진한 주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타인-세상-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을 저버리지 않도록 이끌기 위한 처방이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두고보지 못하듯, 부모의 시신을 벌레들이 뜯어먹는 현장을 두고보지 못하듯, 사람에게는 이유없는 사랑의 마음이 단서로서 남아있다.


다시 지혜와 정현에게 돌아오자. 죽어도 어머니라고는 못하겠다며 영원은 이들을 '지혜씨' '정현씨'라 칭하고, 때로는 '지혜수달' '정현수달'이라 칭했다. 작은발톱수달은 서울 도심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이다. 그렇지만 '이따금' 목격된다, 지혜는 그렇게 주장했다. 영원도 지혜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수달을 목격한다. 만물을 이유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유학에서 성인(聖人)의 영역이다. 세계를 지키려는 천연기념물 내지는 성인과 같은 사람들이 흔할 리 없지만, 분명 '이따금' 존재한다.


기계: 좋은 꿈은 어떤 꿈인가요.
지혜: 내가 움직이는 만큼, 이 세계가 맑고 투명해지는 그런.
기계: 인과관계가 선명한 꿈. 동의합니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화는 지혜를 위한 선물이라며 죽은 정현과 재회한 세계를 보여준다. 거대한 플라스틱 더미를 배경으로, 모든 등장인물이 각자 머리에 구슬을 쓰고 막이 내린다. 극에서 구슬은 세계로 비유된다. 각자의 행복한 평행세계를 얻은 마지막 장면은 안정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안정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지혜가 선물받은 세계는 이루어질 수 없는 평행세계였지만 지혜는 진작 이쪽 세계를 떠나 그쪽 세계로 갈 수 있었다. 정현을 만나리라 믿으며 죽음을 택할 수도 있었고,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며 과거만을 붙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완전하고 깨끗한 나만의 세계를 버리고 굳이 불완전하고 추악한 세계와 연결되고자 했다. 실상은 지혜가 아무리 열심히 움직인다 한들 그보다 빠르게 세계는 탁해진다. 그래도. '그래도'를 붙여 변명처럼 말할 수밖에 없는, 논리나 이익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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