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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Aug 04. 2024

공허와 만남과 상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한 스푼의 불교와 실존

까뜨린느와 사람이 없는 북극에서 오로라를 보자는 괴물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신 그는 창조주, 빅터를 홀로 북극에 남긴 채 떠나고, 절규하는 빅터의 뒤로 오로라가 내린다.

북극에서 마주한 괴물과 빅터
내가 아팠던 만큼 당신께 돌려드리리
세상에 혼자가 된다는 절망 속에 빠트리리라
('난 괴물', 괴물)


괴물(앙리/피조물)은 빅터의 주변인과 지위를 모두 빼앗고, 피조물인 자신의 목숨까지 빅터의 손으로 앗아가게 한다. 차라리 자기를 찢어죽이라는 빅터의 외침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괴물은 마지막 결투의 장소로 북극을 고른다. 그가 닿고 싶었던 곳, 인간이 없기에 가장 아름다운 곳. 괴물은 자신이 겪은 세상의 양면을 모두 창조주에게 돌려준다. 앙리의 기억 때문이든, 피조물로서의 감정이든 창조주를 향한 그의 마음은 애증에 가깝다. 북극에서 빅터를 기다리던 괴물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북극의 하늘 아래서 까뜨린느와 먼 옛날의 빅터를 그리워했듯, 창조주 역시 자신을 그리워하기를 바랐기에 그를 혼자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혼자 단 하나의 존재
철침대에서 태어난 나는 인간이 아냐
너희완 달라 그럼 나는 뭐라 불려야 하나
왜 난 혼자서 여기 울고 있나요 여기 버려진 채로
정녕 나는 태어난 이유가 없나
('난 괴물', 괴물)


괴물이 복수를 결심하는 넘버, '난 괴물'은 이질적인 존재로서의 절망을 노래한다. 하지만 괴물이 느끼는 절망은 인간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이유 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본질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삶의 목적을 만들어 행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괴물이 절망하고 복수를 다짐한 순간 그는 삶의 방향성과 연결성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난다.

생명을 창조하는 빅터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들 모두 내 이기적인 욕심뿐
두 눈을 가리고 그림자처럼 내 야망을 쫓아왔네
('후회', 빅터)


창조주 빅터 역시 타인과 섞이지 못하고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인물이다. 어린 시절 괴물이라 불리던 빅터가 유일한 친구 앙리를 살려내 또다른 괴물을 만들었다. 누구보다 닮았지만 분노와 애증으로 얽힌 관계는 부모-자식의 관계로 환원된다. 내 뜻을 거스르고 나를 파괴하는 피조물. 그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을 겪은 뒤에야 1막 '신에 맞서는 생명창조'는 극의 말미 '나약했던 한 인간의 싸움'으로 재진술되었다.

삶은 공허이자 상실이다. 신에게 도전하는 천재,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성장기는 앙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앙리의 죽음 이후 그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괴물과의 해후로써 빅터는 타자의 세계와 정면추돌했고 (남들보다 늦게)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다. 홀연히 나타나 시련을 주는 2막의 괴물은 마치 창조주와 피조물이 바뀐 구도같다. 욥의 고난과 달리 괴물은 빅터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괴물이 준비한 북극의 아름다움 역시 시련의 보상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상실과 배신에는 어떤 당위가 없다. 동시에 세상에는 퇴색되지 않은 한줄기 아름다움도 있다.


결국 죽으면 땅에 묻혀 썩을 텐데
지긋지긋한 내 인생아
그래도 벗어나고 싶은 욕망
그저 인간이 되고 싶어
('산다는 거', 까뜨린느)


탄생과 죽음은 "신의 자연 섭리, 신만이 정해둔 질서('단 하나의 미래')"와 거리가 멀다. 신이 있다한들 인간같은 미물의 생몰과 행복을 굽어살펴주지 않는다. 단지 (당위성, 합리성과는 조금 다른) 인연과 인과가 있을 뿐이다. 지금도 누군가가 괴로움을 끊고자 속세를 떠나겠지만 대체로는 그러지 못한다. 공허를 채우고자 만남을 지어내고, 만남에 괴로워하고, 지나간 인연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다 보면 흘러가는 것이 한바탕의 삶이 아닐까. 이 고해의 바다에 때때로 오로라가 머무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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