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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Feb 14. 2023

쓰러진 관계

"작가님,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전부터 알고 지내는 에세이 작가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오랜만에 걸려온 그분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성격도 밝고 늘 좋은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좋은 기운을 남겨주는데...' 어떤 일이기에 나를 찾아 이야기를 걸어오는 걸까.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그분이 수업을 듣는 강의에서 선생님과의 사이가 가까울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고 한다. 수업에서 배운 기술들을 사용하면서 선생님의 피드백을 들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적당히 비유만 맞추는 식으로 지도를 하는 게 느껴졌다고. "선생님, 제 실력이 쌓이는지 모를 정도예요. 제가 잘하고 있는지 체크를 좀 부탁드려요.", "아니, 000님은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라는 안심하라는 좋은 말을 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학생들에게는 충실히 답변해 주며 수업을 이어나간 다는 것이다.


그분은 나름이 멘탈을 붙잡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결국에는 선생님에게 항의를 한 모양이다. 좋았던 관계에서 다소 조금 더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이에서 결과는 늘 이렇게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분이 나에게 상담을 해오면서 얻고 싶었던 말은 별로 없었는 모양이다. 그저 자신이 다른 학생과 불합리하다고 느낀 부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결국에는 연락을 끊고, 자신의 수업에서 탈방 시켜버렸다고.


보통의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기분 나쁜 상황에 처하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이 크게 화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락도 끊고, 인스타그램 그리고 페이스북 계정을 닫으면서 기분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 선생님 역시 자신이 화났다고 만천하에 떠드는 상황에서, 지인 작가님은 자신 때문에 선생님이 상처를 받은 것 같다는 죄책감 때문에 나에게 상담을 해왔던 것이다.


"작가님,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처럼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성공을 이뤘다는 사람이 작가님 한 분 때문에 SNS계정을 닫을 정도로 폭발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저 자신이 작가님 때문에 화났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고, 그것 때문에 작가님의 마음이 힘들게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못된 선생님이 여린 작가님의 마음을 끙끙 앓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얘기해 주었다.


Photo by Paris_shin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해놓은 인간관계에 대한 노력만큼이나, 그 관계를 포기하는 걸 힘들어한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작은 순간에 나의 투박한 표현 때문에 상처를 받고 나에게 저주를 퍼붙듯이 단교할 수 있는 걸까. 왜 그러게 힘들어하는 사람은 관계를 위해 노력했던 내가 되는 거야. 나는 늘 그런 생각으로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는 사람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도움이 될 것 같아 꺼내본다. 몇 해전에 전 세계 복싱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 메니파퀴아오가 서울에 여행을 온 적이 있다. 그때가 아마도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이었던 것으로 보면 겨울이 없는 필리핀에서 하얗게 쌓인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가족과 여행을 온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눈은 고사하고 며칠 동안 비만 내렸다. 아무튼, 그때의 겨울비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고, 복싱이라는 운동을 한 번 얘기해보고 싶다.


복싱이라는 운동은 경기 도중에 다운이 되면 경기가 끝나는 거로 아는데, 잘 생각해 보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다운이 되면 다시 일어나라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라고 10초의 시간을 주게 된다. "이게 끝인가. 아니야 그게 아니야." 넘어지고도 10초의 시간 동안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경기는 다시 시작하고 또 결기를 뒤집기도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게 바로 복싱이라고. 


그렇다. 인생이 뒤집어질 정도로 어렵고 힘들고 지치더라도 10초 동안 잠시 숨을 고르고 시작하면 된다. 대부분의 삶이 지치고 어려움의 연속이더라도 힘들 땐 그냥 푹 쉬기를 바란다. 10초 동안 푹 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 다시 일어나면 된다. 잠시의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푹 쉬어가기를 바라는 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때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지? 고생했어? 10초만 쉬자."


인간관계도 그렇다. 한 번 무너져 내린 관계가 있다면 그거 붙잡고 다시 살려내려고 고생할 필요가 없다. 그냥 포기하는 것도 또 다른 관계를 위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복싱선수가 다운이 되더라도 10초 쉬고 다시 경기하면 되는 것처럼, 무너진 관계를 복원하는 데 힘 빼지 말고 '그러려니' 하고 힘 빼고 충분히 쉬기를 바란다. 나에게 상담했던 작가님도 실패한 그 선생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겠지만, 이번 기회에 푹 쉬고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다시 초원을 향해 달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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