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요즘 사람의 당대 과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향해야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많은 전문가들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중한 시간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도 소중한 사람에게서 상처를 얻기도 한다. 행복은 이렇게 내 주변에 있어서 쉽게 발견하기도 하고 또 쉽게 놓쳐버리기도 한다고.
언젠가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를 본 적이 있다. OECD 국가들 중에서 61위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낮아도 너무 낮은 순위 아닌가? 삶의 질은 세계 어느 나라들보다 높을 텐데, 유독 행복 지수에서 낮게 점수를 얻은 데에는 어떤 요인이 있을지 궁금하다. 추측하건대 개인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가 낮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만족스러운 삶이 결국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우리에게는 만족이라는 게 쉽게 다가오는 단어는 아니다.
학교 교육만 해도 그렇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평가에서 아이들을 평가하다 보니 누군가는 성적이 좋을 수 있고, 누군가는 성적이 좋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라는 게 각자의 걷는 속도가 있을 테고,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 일 텐데 말이다. 너무도 같은 기준에 아이를 옭아매다 보니, 만족감이라기보다는 성적이라는 줄 세우기에 어떻게라도 잘 서기 우해 세상의 요구에 따라가기 바빠진다. 그러니 만족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성남에 있는 이우중고등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흔히들 대안학교라고 부르는 이 학교의 학습목표는 이렇다. "더불어 사는 사람,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사람, 창조적인 지성인, 머리가슴 손발이 조화롭게 발달된 사람" 나는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을 목표로 하는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다. 사람이라는 게 모두의 시선으로 똑같은 안경을 끼고 바라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신만의 움직임과 사고가 있을 거니까.
언제부터인지 생각의 범위를 주위 사람이 받아들이는 데 어떨까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또, 외부의 시선에 반응하는 크기와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그 크기의 범위는 내 것이 아닌 듯 낯선 내 모습만 남겨놓게 되었다. 삶의 중심이 나에게서부터 외부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향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아닌 내 삶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 더 심해지는 게 느껴진다.
이제는 조금 더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야 한다. 조금은 벅차지만 내 삶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실패의 연속이더라도,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더라도, 조금씩 개선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회복되어 있고, 또 개선되는 나를 발견하지 않을까. 과하게 잘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현혹될 이유도 없다. 그만큼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왜냐면 나는 정말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잘 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