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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19

여름날의 수련

취미로 뭉친 사람들


40도를 오르내리던 어느 여름날. 퇴근 후 검도 도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하필 다니는 검도 도장이 언덕길 위에 있다니. 수련하는 환경 중 도장의 위치를 원망해본 적은 없지만 여름에 한해서만은 예외다.


수련하러 가야 하는데. 그럴려면 이 언덕 길을 걸어야 하는데. 도장에 도착하는 게 먼저인지 몸이 녹아내리는 게 먼저인지. 당장 아스팔트 위에 눌러붙은 껌딱지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도장에 도착하면 시원한 에어컨이 나를 맞아줄 터였다. 에어컨과 함께 하는 ‘여름의 검도’. 내가 다니는 도장이 지역주민 대상의 스포츠센터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흔치 않은 호사다.


“그래. 이왕 소진한 체력, 좀더 끌어 써보자…”

이게 다 ‘시원한 여름운동’이라는 선물을 나 자신에게 주기 위해서다. 일과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바친 직장인이 나가신다. 짐짓 결연한 마음으로 언덕길을 올랐다. 투덜투덜 “에고 힘들어"를 연발하면서.


여름 수련의 기억


매해 녹록치 않았던 여름의 수련. 땀으로 흠뻑 몸과 마음이 눅진해진 수련의 기억에는 이런 게 있다.


다른 사설 도장에 보호구를 들고 교검(검도 동호인들은 다른 도장에 교류하러 갈때 이 단어를 쓴다)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한바탕의 대련 끝에 모두 얼굴이 빨개질 만큼 헉헉 대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도장 한켠에 우두커니 선 커다란 선풍기 한 대 뿐. 몸을 식히려 선풍기 앞으로 순식간에 몰려간 사람들을 보며(사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며) 속으로 웃었다. 선풍기 바람 앞에 온몸이 푹 젖은 채 바람을 쬐는 사람들. 남들이 보기에는 열정 가득한 스포츠 영화 속 한 장면이려나. 극한의 체력고갈을 경험한 당자사한테는 짠내 나는 인생의 한 장면이다.


그래도 ‘평생검도'를 외치는 검도 동호인들. 폭염 속에서도 검도를 하고 싶다며 기어코 모이고야 만다. 참 대단(그리고 더위 앞에 짠해지는)한 사람들 같으니. 게다가 여름 운동은 힘들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뜨거운 날씨 덕에 충분히 이완된 몸이 근력 증강과 스피드 강화에 대한 연습 과정을 더 잘 기억하는 듯하다. 몸에 새겨진 훈련의 성과는 시합에서 보물처럼 쓰인다. 게다가 검도시합들은 대부분 여름에 몰려 있다. 훈련의 성과를 유감없이 발휘할 절호의 계절이랄까. 오래 검도한 사람에게 여름은 애환과 뿌듯함이 교차하는 계절이다.


다시 30대가 된 지금의 나로 돌아와본다. 몸은 예전처럼 찌는 더위도 훈련량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더운 날 도장으로 발걸음하는 나. 십수년 동안 이 시간을 이어온 관성 탓일수도, 오래 하다 보니 굳은살처럼 박혀버린 ‘검도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인 듯도 했다.


그래. 도장에 가자. 더위도 검도 덕후의 수련생활을 막을 순 없다.


더위에 두들겨 맞는 때


스트레칭과 기본동작 연습까지는 상쾌했다. 슬쩍 땀이 흐르긴 했지만 그때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땀을 말려줬다. 이때까지는 쾌적한 수련생활 그 자체였다.


문제는 대련연습에 돌입하면서부터였다. 넘쳐 흐르는 땀. 땀은 줄줄 새어나와 어느새 두꺼운 도복과 내 몸이 찰싹 붙었다. 하긴. 발목까지 덥히는 도복과 5kg 남짓한 무게의 보호구. 이걸 몸에 입고 쓴 채로 여기저기 뛰어 다니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내 몸에 이리 물이 많았다니! 서로 기합을 내지르며 대련할 때 뜨겁게 내뱉는 내 숨과 상대 숨 때문에 더위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나를 때리는 게 사람인지 더위인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몸을 움직이는지 몸이 나를 휘두르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흐물거리는, 그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수련 시간이 끝났다. “차렷, 호면 벗어!” 선배들은 무릎을 꿇고 도장 바닥에 앉은 다음 구령에 맞춰 호면을 벗었다. 앉긴 했지만 아직까진 조금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일시에 평정하는 구호가 울린다. “정좌. 묵상~!” 도장 관원 중 가장 고단자가 선창하면 다들 무릎 위에 손을 포갠 상태에서 눈을 감는다.


들숨 날숨의 순간. 새빨개진 얼굴에 거칠었던 숨이 점점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렇게 수련에 임했던 각자의 숨과 마음이 찬찬히 가라앉는다. 대련의 흥분이 가시고 성취감과 개운함이 남았다.


편의점에서의 음료수 타임


더운 날에 수련을 끝내면 괜히 그냥 집에 가기 아쉽다. 그래도 우리 이 뜨거운 계절에 같이 고생했잖아요. 힘든 날씨를 뚫고 함께 수련한 검우(검도하는 친구를 가리키는 검도 동호인들의 용어. 검우인가 전우인가.. )들과 작은 자축을 하고 싶어진다고요.


20대부터 60대까지 고루 분포하는 검도 동지들과 어딜 가야할지 고민한다. 주중의 술은 좀 번거롭고, 이럴 때는 음료수를 마시러 편의점 행이다. 선배들에게 슬쩍 바람을 넣어봤다. “편의점에서 가볍게 음료수 한 캔 드실래요?” “좋지.” 아까 지옥의 오르막길이었던 도장 가는 길목에는 사실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편의점이 하나 있다. 거기까지 가다 보면 또 땀이 흐르지겠지. 그래도 땀의 연쇄작용을 막을 여름밤의 필살기가 그곳 냉장고에 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와 간단히 먹을 과자를 샀다. 그런 후 편의점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편의점 밖에서 사온 것들을 펼쳐놓는 잠깐의 수다 타임. 대련할 때는 서로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칼을 겨루건만 호구를 벗으면 조근조근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 전후의 모습이 퍽 대조적이다.


게다가 편의점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40대, 50대 남자선배들과 내 모습이라니. 이 묘한 조합이 어떻게 가능한건지 싶다. 직장생활에서 만났다면 직급이나 나이 차 때문에 이런 편한 분위기로 대화하긴 어려울텐데. 취미가 만들어준 인간관계의 힘 같다.


선배들의 대화는 때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럴 때는 가능한한 그저 조용히 듣는다. 내 생각을 말하는 게 나을까 싶지만 조용히 듣는 편이 더 익숙하다. 음료수와 과자를 앞에 두고 서로 시간을 내어주는 지금. 그 자체로 충분한 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의 바깥에서 선배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회사에서도 직급에 대한 위계가 그리 강할 필요 없을텐데. 그렇다고 회사에서 상급자에게 “우리 친해져봐요” 하면서 음료수와 과자봉지를 들고 모인다면 많이 어색하겠지. 일로 만난 관계는 어쩔 수 없는 걸까. 맥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 그 정도면 대화의 준비물로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해 보이는데. 이런 식으로 선배들의 한켠에서 관계의 공상을 펼쳐봤다.


이제 공상에서 현실로 돌아와야겠다. 찬 음료를 목으로 넘기다 보니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뚜렷하게 느껴졌다. 음료수 대담은 짧게 끝났다. 선배들은 자리를 정리한 후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나도 터벅터벅 집으로 걸었다. 곧 개운함과 피곤함이 뒤섞인 채 푹 잠들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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