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 Jun 02. 2020

회사 동료들과 검도 한 판!

취향 독재가 부른 토요일 낮의 검도 1일체험


“눈 앞에 미운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강하게 쳐봐.

예를 들면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상사라던가.”


도장 선배들이 하급자와 대련할 때 상대의 치는 힘이 약하다 싶으면 이런 말로 용기를 북돋(는다기 보다는 잠자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느낌인데..)을 때가 있다. 관용구처럼 선배들에게서 나오던 그 말. 선배들도 검도 경력을 쌓던 어느 시점에 대련 상대에게 미운 얼굴을 덧씌우며 자랐는지 모른다.


나를 괴롭히던 상사라. 사실 이와 관련해 종종 상상했지만 못 이룬 로망이 하나 있으니 바로 상사와의 검도 대련이다. 일의 세계에서는 윗사람이지만 검도의 세계에서 막 걷기 시작한 상대. 그런 상대와 칼을 맞대고 싶었다. 죽도 끝에서 터져나와 손끝으로 전해지는 상쾌한 타격감. 그 내려치는 죽도의 끝에 상사의 머리가 있다면 어떨까? 수련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상상이 간간히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검도 초심자 중 상대가 아플까봐 못 때리는 사람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런 사람조차 뭐라도 치고 싶을 만큼 화가 쌓이는 게 인생인지라...


어찌됐건 상사와의 대련은 꼭 때리고 싶어서라기 보다 같이 운동하면 서로 건강해지니 좋은 일이라서, 라고 해두겠다. 검도의 신이 있다면 내 불순한 의도를 읽었는지 상사의 정면머리를 치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검도 입문에 대해 문의한 상사가 딱 한 사람 있었다. 내심 놀라면서 응대를 잘 해보았는데 아쉽게도 도장 등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내 상상에 근접한 어떤 순간이 실제로 벌어진 건 상사의 검도 문의 이후 4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상사는 아니지만 회사 사람들과 검도를 해본 것이다. 검도 1일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체험에 참여한 사람들을 단 하루만에 기본 동작부터 호구 착용, 대련까지 경험하게 한 날이었다.


작은 대한민국 같은 회사모임


일과가 끝난 저녁시간. 이때의 나는 보통 수련 시간을 사수하는 도장의 관원이다. 하지만 가끔은 에디터로 일한 전 회사 편집부 동료들과의 모임 ‘탈룰라'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름이 탈룰라라니. ‘맥락 모르고 튀어나온 말실수를 수습한다’는 뜻과 영 안 맞아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모임의 채팅방은 각자의 강한 개성과 한 마디라도 더 하려는 발언 욕구가 더해져 종종 누적 대화 200개가 넘는 ‘집단적 독백'의 장을 만들어버린다. 내 느낌에 (나를 포함하여) 이들의 대화는 흡사 용광로 같다. 여러 인종이 섞인 미국사회의 역동성 같은 게 느껴진달까.


채팅방으로만 존재하는 작은 미국, 아니 우리들끼리는 ‘작은 대한민국’으로 부르는 탈룰라 사람들. 이 6인의 용사들은 회사에서 함께 일할 때 야근과 술의 무용담을 만들어내더니, 함께 일하던 회사에서 전원 퇴사한 후에는 각 개인이 호스트가 되어 ‘뭘 하던 호스트 마음대로'가 철칙인 탈룰라데이를 만들어 함께 놀고 있다.


취향 독재가 평등함을 부른다


탈룰라데이 때 했던 경험을 꼽자면 이런 것들이다. 8m 높이의 실내 점프체험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스포츠몬스터(난 높은 곳이 무섭다), 동네 뒷산 같다는 말에 방심했다가 정상 가까이의 가파른 바위들을 보며 생존의 위협을 느꼈던 등산.


여기에 엄청난 텐션으로 늦은밤까지 수도 이름 맞추기, 초성게임, 마피아 게임(이마저도 각자 경험한 룰이 달라 나중에는 룰의 진위여부를 다투는 자리로 변질됐던) 등등 각종 단체게임을 했던 에어비엔비에서의 하룻밤까지.


행동 반경이 검도 도장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평소의 내가 잘 안 할 경험들이 나날이 쌓였다. 개별적으로는 연관성 없어보이는 각 경험이 개인에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고루 쌓인다는 면에서, 각 호스트들의 취향독재에는 묘하게 민주적인 면이 있었다.


하루만 검도해봅시다!


어느덧 나의 호스트 차례가 다가왔다. 내가 생각한 탈룰라데이의 주제는 1일 검도체험. 평소에 운동과 친하지 않아도, 검도가 재미없어도 빠져나갈 수 없다 이 사람들!


내가 가르칠 수 있으니 하루 2시간 속성으로 기본 동작을 소화하게 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슬쩍 대련도 시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일단 도장 사범님에게 공간 사용에 대한 허락을 받고, 호구 두 개를 빌려 대련체험을 시키기 위한 만반의 채비를 갖췄다.


“기본연습, 공간치기 연습, 대련체험, 숙련자 대련 관람 등의 순서로 진행될 거에요. 옷은 운동할 수 있는 편한 걸로 입고와요.” 체험 전에 프로그램 구성 준비와 모임 장소, 모임 후 예상 식사장소까지 공지 완료. 모임 전에 챙겨야 할 준비사항이 끝났다.


“필살기 가르쳐줘요?”

“이도류 할 수 있나요?"

“(만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며) 괜찮을까. 내 발도술에 함부로 덤비면.."


채팅방에서 전 회사의 편집국장(이자 만화 덕후) 이상훈의(나와 동갑내기다)의 이런 저런 말이 이어졌다. 만화 ‘바람의 검심’ 속 주인공의 필살기를 떠올리다니 역시 동년배 덕후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것저것 답했고 발도술과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이 짧게 말했다.


“괜찮아요. (초보자님이) 칼도 뽑기 전에 (숙련자들에게) 베일거야..”


이제 눈을 뜨세요, 검도의 날이 밝았습니다


화창했던 토요일. 마피아 게임의 오프닝처럼 검도의 날이 밝았습니다 여러분.


모임 시작시간인 오후 세 시가 되자 사람들이 약속 장소인 검도 도장에 모였다. 내가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장소에 전 회사 동료들이 서 있는 모습. 이 사람들을 내 일상생활에서 깊숙한 장소에 들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 모였으면 이제 검도를 시작해봅시다.


각자의 자세가 잘 보이도록 사람들을 벽쪽의 전면거울을 보고 서게 했다. 검도 인생 1분차인 이 검도 어린이들에게 아장아장 걸음마, 아니 검도에서의 걸음걸이 방식인 보법부터 알려줘야 했다. “왼발은 뒤로, 오른발은 약간 굽힌 상태로 앞으로. 발과 발 사이는 발 하나 정도로 떨어지는 거에요.”


보법의 기본자세를 잡았으면 그 다음에는 앞과 뒤, 좌우를 왔다갔다 하는 일명 ‘밀어걷기’. “앞으로! 뒤로! 좌로! 우로!” 기합에 맞춰 나도 함께 밀어걷기 스텝을 밟았다. 걸음걷기를 마친 후 죽도를 쥐어주는 방법을 알려줬다. “차렷. 허리 칼(왼손에 쥐고 있던 죽도를 허리 춤으로 올린다). 뽑아 칼!(오른손이 칼을 앞으로 뽑으면서 칼을 몸의 가운데로 놓는다)” 초보자 입장에서는 군대문화마냥 구령과 반말이 어색할지 모르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달까.


칼을 앞으로 뽑으며 검도의 가장 기본자세인 ‘중단세’를 잡게 했다. 검도의 기본 타격인 머리와 손목, 허리를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치는 기본동작까지 익힌 이 사람들. 타격대를 앞에 두고 타격부위를 치고 나가는 공간치기까지 해냈다. 1일 검도체험의 의의는 ‘체험’에 있으니 이럴 때는 자세의 완성도보다 진도를 빼는 게 맞지싶었다.


치고 싸우는 투쟁은 본능인가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계속 살펴보니 체험시간 중에서 타격대를 치고 나갈 때 가장 생기있어 보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루한 검도이론보다 ‘때린다는 감각’ 자체만으로도 검도에 재미를 느끼게 할 수도 있겠다”. 치면 기분이 좋은 것. 단순명쾌한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중 두 사람의 지원자를 받아 대련체험을 진행했다. 한 사람은 만화 ‘바람의 검심’을 읽으며 자란 복싱 n달 경력자 이상훈(본인이 배웠을 복싱스텝이 검도대련에 필요한 발놀림에 도움이 된다는 걸 그는 몰랐다). 그의 상대는 골프 경력자로 골프채 쥐는 그립감과 죽도를 쥐는 파지법의 경계를 허무는 송대희. 두 사람에게 준비한 도복을 입히고 호구 쓰는 법을 알려줬다.


시합장의 가운데로 성큼 들어온 두 사람. “시작!” 심판 역할을 맡은 내 구령에 따라 시합이 시작됐다. 타격부위 말고는 딱히 알려준 게 없었는데 왠걸. 서로 치열하게 공격했고 시합의 결과는 머리치기를 두 번 성공한 송대희의 승리. 역시 투쟁은 인간의, 아니 종을 초월한 동물의 본능인가. 대련한 후에는 기존 수련자들의 대련을 구경하게 했고, 체험자나 다른 쪽에서 수련하고 있던 기 수련자 모두 무릎을 꿇고 정좌 자세로 묵상을 하며 체험의 날이 마무리됐다.


어쩐지 나만 혼자 흐뭇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 장단에 맞춰 이것저것 시도해본 이 사람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건네고 싶다. 어떤 의도가 실현되려면 그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 이 사람들이 그 마음에 반응해줬다는 거니까. 내 관심사 외에 다소 무심한 성격의 내가 다른 분야에 관심 갖고, 자꾸 그 분야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타인의 관심사에 진심이 되게 만들어준달까. 그 과정에서 내 관심사도 나누게 되고 말이다.


이렇게 나의 검도덕질 생활은 다른 분야의 생활과 조화점을 찾아가며 계속된다. 검도를 무척 좋아하는 나. 사회생활을 하는 나.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배려해야 하는 나. 주변 사람들 덕에 넓어지는 시야, 그에 영향 받으며 변하는 다양한 ‘나들’이 발맞춰 균형점을 찾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날의 수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