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스스로를 돌이켜보기에, 다수의 취향을 좋아하는 데 소질이 없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예능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체온이 2~3도는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대화에 섞일 적당한 말이 뭐 있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던져보지만 진심이 없어서인지 어정쩡한 말만 튀어나온다.
결국 혼자 속으로 “난 만화가 더 좋아.."라며 돌아서는 식이다. 맛집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어째 운동 취향도 마이너한 듯하고...(그 취향에 대한 내 사랑은 차고 넘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폭은 분명 넓어졌다. 남들이 좋아하는 걸 따라해보는 노력의 순간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상대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며 간신히 짐작할 뿐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통하는 느낌의 사람을 만나면 뭐라도 말하고 싶다. 말수가 적은 편인 내가 쉴새 없이 수다를 떠는 희귀한 순간. 즐거운 대화라 생각하다가도 뒤돌아서면 불안하다. 대화할 때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살폈나? 상대가 나에게 맞추는 데만 애쓴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서 한달음에 달아나고 싶다.
다가가고 싶은 내 마음만큼이나 그 다가감이 상대에게 기꺼운지 살펴야 할텐데. 나란 사람은 번번히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마는 듯했다. 자기 마음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타인의 반응을 살피는 데 참 서툴다.
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어느 날은 도장의 한 5단선배가 나와의 대련 후 다가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대련할 때 보니 대화를 안 하는 것 같네요."
“네?(기합 내지르며 서로 치고 받는 순간에 대화할 틈이..?)”
“무작정 치기만 하지 말고 상대와 죽도를 맞대면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반응을 봐야죠.”
“아아..”
스님들의 선문답 같은 건가.
선배의 말에 동공이 흔들렸다. 칼을 맞대고 싸울 때 “머리!” “손목!” “허리!” 기합을 외치며 헉헉 대기에도 바쁜데 대화까지…? 고민 끝에 ‘치고 싶은 걸 치는 데 급급하지 말고 상대를 봐가며 쳐라’ 정도로 이해했다.
대련 스타일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참 잘 보인달까. 성격 급한 사람들은 공격 횟수가 많고 몸도 자주 부딪혀온다. 게으른 듯하면서 상대방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적게 움직이다가도 상대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식이다.
내 경우는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성격이 드러나나 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치려는 타격부위를 마음속에 정해놓고(상대는 내 공격이 훤히 보여서 받아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인데도) 상대의 반응과 상관 없이 무조건 덤볐으니(당연히 내 공격은 상대에게 막혔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검도를 오래 했거나 운동 센스가 있는 사람들 눈에는 금방 내 동작이 읽혔을 거였다.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대국에서 두 세 수 정도 앞을 내다보고 공격하는 게 좋아요."
다른 선배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해줬다. 그걸 내 몸으로 해낸다는 게 어려웠다. 당장의 상대 반응도 못 읽겠어요. 눈 앞의 상대를 보면서, 그에 맞게 뭘 칠지도 생각하면서, 상대가 만약 막는다면 나는 또 이렇게 저렇게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 것까지 생각해야 하다니. 회사에서도 멀티태스킹이 안 되어 종종 사고뭉치인 제가 그걸 해낼리가요.
버티기가 전부인가?!
상대를 보려면 몸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몸 상태가 좋으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해 튀어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퇴근 후 죽도를 쥘 때면 지친 탓에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점점 상대의 반응을 관찰해 기회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상대에게 빈틈이 생기길 기다리는 쪽에 가까워졌다.
물론 나보다 훨씬 오래 수련해온 고단자 선배들이 쉽게 틈을 내줄 리 없었다. 오히려 상대방 쪽에서 매섭게 밀어붙이는 타격이 이어졌다. 가끔은 호면을 쓴 채로 눈물이 찔끔 났다. 흐르는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눈물을 슬쩍 닦았다(좋아 자연스러웠어). 만약 검도가 일종의 카드게임이라면 나는 ‘버티기'라는 패밖에 내놓을 게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점차 상대를 관찰하고, 그 관찰에 걸맞게 몸이 반응하는 순간이 드물게 찾아왔다. 내게도 보는 눈이 생겼는지 피할 구멍도, 타격 기회도 조금씩 잡기 시작했다. 버티다 보니 요령이 생겼나보다. 100번 맞다가 2번 정도 공격에 성공하는 정도랄까. 신기한 건 2번의 성공에서 느낀 기쁨이 98번에서 느낀 좌절감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중심을 지키지 않고 머리공격을 해오는 상대의 죽도 중심을 누르고 머리치기. 죽도 끝을 아래 위로 움직이는 상대는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일어나는 멈춤의 순간을 몸이 감지하고 뛰어들어가 머리치기. 상대의 반응을 보고 칠 때는 확실히 타격의 타이밍이 정확하다. 스스로 한 공격에 대한 자기 확신도 더 크게 느껴졌다.
어느 날에는 시원하게 뚤리는 시야와 손끝에 전해지는 생생한 타격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맞은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 있으므로 웃는 건 되도록 자제하는 게 좋지만. 그래도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웃음에 가득 담겼다.
검도는 참 재미있어.
건망증이 심한 나는 그간의 고생을 다 잊고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대화하는 검도를 위해 생각한 것들
검도의 대련이 한편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면, 나는 이제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상대와 나의 적정거리를 찾는다. 그 거리는 실제로 몸과 몸이 떨어져 있는 ‘물리적 거리’이자 ‘마음의 거리’이기도 하다. 검도에서는 일족일도의 거리라 해서 한 걸음을 들어가면 칠 수 있는, 반대로 한 걸음 물러나면 상대가 공격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도 하체의 힘이 충분히 뒷받침되거나 상대방 칼의 중심이 비껴나 있다면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다.
어떤 상대가 됐든 뭐라도 치려면 결국 다가가야 한다. 거리를 좁혀가는 스타일이 나와 안 맞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스타일이 맞는 사람하고만 칼을 맞댈 수는 없다. 그때그때 다른 상황과 사람 앞에 어떻게 거리를 만들어가는지 찾게 된다. 거리에 대한 이론이 궁금해서 찾아본 일본의 고단자 선생님의 글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어떤 사람과 대응하던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 그게 거리다."
약간 먼 거리에서 상대의 죽도에 내 죽도를 붙인다. 그러고는 상대가 죽도에 주는 힘의 방향을 가늠해본다. 이 사람은 죽도를 쥐는 힘이 한쪽으로 쏠려 있나? 그러면 그 힘의 반대 방향으로 죽도를 살짝 밀어본다. 힘의 반동으로 상대의 죽도가 더욱 쏠리면 그 반대 방향으로 죽도를 돌려 상대를 공격하는 식이다. 힘의 치우침이 없는 상대라면 죽도에 슬쩍슬쩍 힘을 주면서 발동작을 통해 몸을 더 많이 움직이며 빈틈을 찾아가는 식이다.
몸을 통해 하는 이런저런 대화. 상대의 죽도를 툭툭 건들여보고. 조금 먼 거리에서 괜히 위협도 해본다. 기분 혹은 몸짓 같은, 상대가 다양하게 보내는 신호에 머리 혹은 몸이 반응하는 어떤 대화가 있다. 내가 뱉는 말이 서툴다 싶으면 여전히 도망가거나 입을 닫고 싶지만, 간신히 포기하지 않은 끝에 서로 통하는 듯한 잠깐의 순간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