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움직임을 지탱하는 몸
“검도하면 살 빠지나요? 몸매가 예뻐지나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저 질문을 많이 봤다. 오프라인에서도 처음 검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스포일러를 하자면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운동 후 맥주와 치킨으로 배를 채우면 쓴 열량과 얻은 열량의 계산이 안 맞지 않겠나. 내가 생각하는 체중감량은 명확히 덧셈(먹은 칼로리)과 뺄셈(움직인 칼로리)의 영역이다.
살은 몸을 열심히 움직이면 빠진다. 검도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다. 다만 몸매가 예뻐지는지 여부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련하는 몸은 항상 아름답지만 검도에서 진행하는 수련 프로그램은 목적 자체가 다르니까. 내 생각에 몸의 구석구석을 자극해 선을 예쁘게 만드는 건 필라테스같은 운동의 영역일지 모른다.
그래도 검도를 해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검도에서의 몸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당신이 기대한 바와 조금 (사실 많이) 다를 것이다.
공격기술을 잘 구현하는 몸
칼 끝은 목 정도의 높이. 왼손이 죽도 끝을, 오른손이 죽도의 앞 부분을 잡는다. 상대를 겨누며 나 자신도 방어하는 검도자세의 기본 중 기본, 중단자세다. 손목과 팔, 어깨근육을 부드럽게 써서 죽도를 들어올렸다가 앞으로 뻗으면서 머리치기와 손목, 허리, 찌름의 공격부위에 해당하는 곳을 타격한다.
검도에서는 이런 공격에 필요한 자세연습들을 주로 한다. 밀어걷기, 발구름 등 하체연습을 별도로 하는 경우도 있다. 전부 실전에서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본기들이다. 지극히 실용적인 움직임이랄까. 어떤 특정 동작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몸이다.
반듯한 자세로 공격 타이밍을 잡았던, 공격의 순간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죽도의 부드러운 궤적. 리드미컬한 움직임 끝에 강하게 내리꽂히는 호쾌한 죽도 소리. 그런 걸 볼 때 이런 생각이 들고 만다. “와, 진짜 멋있다. 저 기술을 어떻게 저렇게 성공시키지?” 실제로 아마추어 검도대회에서 어떤 선수의 시합을 보는데 같은 시합을 보던 뒷 사람이 감탄사를 터트리기도 했다.
내 생각에 검도하는 몸의 아름다움은 기술을 구현하는 움직임 그 자체다. 김연아의 군더더기 없는 점프 동작에 탄성이 나오는 것처럼.
검도에서 두드러지는 몸1- 팔
이렇게 기술을 구현하는 연습을 오래 하다 보면 몸에서 유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느껴진다.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건 오른 팔꿈치 위쪽의 팔 두께(왼팔보다 확실히 두껍다). 그리고 팔꿈치 아래로 미세하게 갈라지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팔 근육들이다. 오랫동안 죽도를 휘두른 흔적이랄까.
내 경우는 검도를 하면서 팔 힘이 좋아졌다. 택시 탈 때 신경쓰지 않으면(의도적으로 힘을 약하게 쓰지 않으면)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얘가 운동을 해서 팔 힘이 세요.” 함께 택시를 타는 아빠가 택시기사에게 양해를 구하는 순간이 여러번 있었다.
생활에서의 예를 더 들자면 요리할 때 잘 안 열리는 병뚜껑을 따는 것도 내 몫이다. 회사 다닐 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정수기의 물을 갈아끼기, 무거운 화분 들어올리기(들어올릴 때 팔 부분이 미세하게 갈라져 ‘우와' 소리가 어디선가 나온다) 등등도 잘 할 수 있다. 아직까지 무거운 걸 들어도 어딘가의 근육에 무리가 가는 불편함이 없다.
팔 힘 덕에 무리해도 크게 다치지 않거나 아프지 않은 몸. 나이를 먹을 수록 소중하고 감사하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근육통으로 눈물 쏟던, 20대 시절 수련의 나날들이 나를 뒷받침해준 거겠지.
검도에서 두드러지는 몸2- 다리
사실 내 다리는 검도와 상관 없이 일관성 있게 튼튼하다. 긴 도복 하의에 가려져 잘 안 보이지만 남자 선배들과 대련할 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같다. 어떤 선배와는 압도적인 힘 차이로 몸 싸움하다 넘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선배들과는 어느 정도 몸 싸움을 해보는 것도 가능해서다.
검도에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움직임과 힘은 하체에서 나온다. 때문에 하체의 힘은 내 몸의 유용한 전력이다. 남자선배들과 맞붙을 때 내가 여자이니 힘대 힘으로 부딪히면 비효율적일 순 있겠지만. 힘에 기반한 공격기술을 시도해보는 건 연습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잘 못 한다고 가능한 동작만 연습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한계 짓는 일이니까. 아직 내 몸에 없다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몸짓을 못 해내리라는 법. 그 누구에게도 없다. 무엇보다 (거의 시합장에서만 볼 수 있어 슬프지만) 여자분들과 대련할 때 나도 힘에 기반한 공격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연습 안 해본 동작이 시합에서 기적처럼 나오길 기대할 순 없으니 말이다.
힘에 기반한 움직임들을 성에 찰 만큼 시도해보았고,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내 힘과 실제로 상대가 느끼는 내 힘에는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끔 도장에 놀러온 여자분들에게 나는 힘쎈 언니였다는 사실. “그 언니 힘이 세요"라는 말이 돌았다는 걸 알고는 뻘쭘해졌다. 아. 도장 관장님도 내 다리 힘에 대해 언급한 바 있었지. 직접적이진 않지만 애인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너의 다리 힘은 상미보다도 약해!” 관장님이 애인에게 한 말이었다.
기능을 통해 내 몸의 일부를 긍정하는 과정에서 묘한 신뢰감이 싹튼다. 수련하는 과정에서 내 다리와 나는 좋은 팀이다.
검도에서 두드러지는 몸3- 동체시력
근육이 수행하는 힘 외에 수련하면서 두드러지는 몸의 기능이 있다. 바로 동체시력이다. 수련이 깊어질 수록 공격이 이뤄지는 찰나의 순간을 눈이 포착할 때가 생긴다. 마치 카메라 렌즈가 줌인된 것처럼.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때릴 부위가 크고 넓게 보이는 경험을 몇 번했다. 집중할 때 느껴지는 거라 드물게 찾아오지만,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 경험 덕인지 안경을 쓸 만큼 시력이 나쁘지만 어떤 물건이 떨어지는 순간을 잘 보고 잘 잡는다. 주로 잡는 건 먹다 떨어뜨리는 젓가락. 이건 나 외에 다른 선배들의 본인 경험담도 있으니 더 믿을 만하다. 검도가 호신술로 유효한지는 모르지만 이런 신변잡기에서는 유용하다.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잠시 터져나오는 “오~”라는 짧은 환호성은 덤.
검도의 호신술 유용성 여부는 실제로 괴한이 나타났을 때 내 몸에 긴 막대가 들려 있다면 그때 검증해봐야겠다. 괴한을 만나기는 싫지만.
일상을 지탱하는 평범한 몸
적당한 살집, 먹은 것 대비 그리 뚱뚱한 느낌이 들지 않는 묘한 탄탄함, 의외의 몸받음 힘 등등. 검도하는 내 몸은 이토록 평범하다. 더욱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하는 실업선수라라면 더 마르거나, 혹은 살집이 있더라도 더욱 근육이 단단하겠지. 여기에 숨이 턱까지 차오를 격렬한 대련을 버텨왔다면 몸이 한계에 다다라도 정신력으로 버텨낸다.
기능을 표현하는 몸,
삶에 필요한 움직임을 지탱해주는 몸.
몸이 한계를 넘어서더라도
긴장감을 놓지 않는 정신력까지.
검도하는 몸은 그렇게 이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