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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Apr 08. 2020

남자부 시합에 출전한 여자

장년부 1명과 중년부 3명, 여성 1명의 혼성팀



그날의 나는 단체전의 일원으로 참여한 선수였다. 


5인조 중의 4번째. 내 순서의 시합을 앞두고 몹시 긴장됐다. 단체전에 나가고 싶어 했던 건 맞은데, 막상 내 앞에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니. 싸우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전혀 다른 두 마음이 내 안에서 다투고 있었다.


단체전 출전을 오래 꿈꿨다. 다른 도장의 여자 단체팀들은 함께 몸을 풀고 파이팅을 외치는데 나는 대부분 혼자 시합에 나간다. 시합에 이기고 싶다는, 같은 마음으로 서로 화이팅하는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시합 출전 이전에 일상에서 함께 수련할 여자분들 자체가 잘 없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단어 중 현실감 없는 단어를 꼽는다면 '부자' 다음에 '팀워크'를 꼽겠다. 


그러던 내가 단체전 1회전에서 시합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5kg이 넘는 호구를 입고 굳은 다리를 풀기 위해 폴짝폴짝 뛰면서 말이다. 검도의 신이 있다면 나의 소원을 이뤄준 것인지 모른다. 남자 선배들과 남자 단체전 시합의 멤버로 나간 건 예상 밖이지만.


매해 열리는 아마추어 검도대회 중 최대 규모의 ‘한국사회인검도대회'. 이 대회의 규정집을 잘 살펴보면 예외 조항이 하나 있다. '혼성팀은 단체전 1팀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이다. 남자 단체전의 인원이 부족할 때 남자 4인과 여성 1인의 구성으로 출전 가능하다. 내 검도 인생에서 한번도 실현된 적 없는 이 조항을 현실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저희 이번에 혼성으로 시합 나가봐요. 저희가 꼭 이기려고 나가나요? 다 경험이죠. 여자인 경우는 심판 분들이 남자들과 시합할 때의 신체적 열세를 어느 정도 감안해준다고 하니까 그 점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지 몰라요." 


호전적이고 빠른 칼을 구사하는 4단 재성선배, 그해 처음 도장을 옮겨와 꾸준히 연습량을 늘리던 2단 진용선배, 도장의 터줏대감인 과묵한 4단 경진선배. 여기에 여자 4단인 나까지. 남자 장년부 1명과 남자 중년부 3명, 여성 1명으로 팀이 꾸려졌다. 출전할 시합 부문은 남자 장년부 시합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시리즈 영화인 마블 히어로 시리즈의 '어벤저스'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았달까. 인간 한 명에 외계인 여성, 말하는 라쿤처럼 일관성 없는 성비와 연령으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말이다


시합 당일, 시합장에 도착해 장년부 시합을 구경했는데 웬걸. 상대방의 칼 속도를 가늠해보려 시합들을 구경하는데 선수들의 움직임과 타격에서 키와 힘, 스피드의 우세함이 피부에 와닿듯 확연히 느껴졌다. 남자 장년부는 체력적으로나 숙련도로나 검도 수련자들 중에서 가장 막강한 전력들이 몰려있다. 이런 긴장감과 상관 없이 우리 도장의 시합순서는 속속 다가오고 있었다. 


"첫 시합이 마지막이면 어떡해. 내가 단체전에서 제 역할을 못 하면 어떡해." 무서운 마음에 다리가 점점 뻣뻣해지던 나. 순규 사범님은 긴장 때문에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진득하게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시합장 근처에서 자꾸 돌아다니던 재성선배. 가디언즈갤럭시처럼 제각각으로 반응하는 우리들. 


곧 시합이 시작됐다. 검도의 시합은 단체전이라 해도 기본적으로는 개인전이다. 각 팀에서 1명씩 나와 1대 일로 벌어지는 시합을 쭉 이어서 한다. 선봉-2위-중견-4위(부장)-주장의 순서로 이뤄진다. 내 포지션은 4위였고 어느덧 선봉부터 중견까지의 선배들 시합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선봉이 2:1로 승, 2위는 1:1로 무승부, 중견은 0:2로 패. 현재로썬 1승 1무 1패의 전적이었다.


내 시합이 시작됐다. "시작!" 주임 심판의 외침에 “이야아압!" 서로 기합소리를 내며 기선제압을 하는 전초전이 벌어졌다. 나도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는데, 평소 저음에 가까운 내 기합소리와는 결이 다른 소리가 났다. “꺄아아악!" 육식동물 앞에서 발버둥 치는 초식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이 소리. 기합인가 비명인가. 어쩌다 내 입에서 이런 괴성이 나왔는지.


1점 실점. 섣불리 상대의 공격 거리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 애썼는데 한 대 맞았다. 전체 러닝타임 3분 중 초반에 맞았다. 앞으로 1점만 더. 몇 번 칼을 부딪히다가 상대가 머리 치기 공격을 시도하는 타이밍에 날아오는 죽도를 받아 상대의 오른 허리를 쳤다. 손에 시원한 타격감이 전해진 순간. 득점을 인정하는 주임심판의 심판기가 위로 번쩍 들렸다. 


소처럼 뒷걸음치다가 뭔가 얻어걸리듯 물러나며 타격하는 퇴격 머리치기도 득점으로 인정됐다. 그렇게 시합 종료. 주장인 순규선배의 무승부 투혼까지 더해져 팀의 최종 스코어는 2승 2무 1패로 마무리됐다. 


1회전 통과. 이 팀원들로 총 4회전을 치렀고 네 번째 시합은 조 결승이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각 지역의 도장들이 1회전만 뛰고 숱하게 발길을 돌리는 곳. 전국 단위 아마추어 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경험치였다. 


시합에서의 내 개인 승률도 좋았다. 3승 1무. 심판들이 나를 얼마나 봐줬는지 정확히 가늠할 순 없었다. 다만 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다. 평소에는 은연중에 얌전하고 예의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눌러놓은 내 모습. 시합장 안에서는 겁 많지만 화도 많은 모습을 아낌없이 개방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팀워크의 경험치였다. 시합에 필요한 역할을 해내며 다른 사람들과의 시너지를 냈던 순간, 시합장 바깥에서의 응원소리 시합 시간이 30초 남은 때부터 “20초!” “10초!”라고 큰 소리로 외치던 목소리, 평소 검도 교류나 시합을 통해 서로 알고 지내던 다른 도장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보태주었다. 응원 목소리가 두려워하는 마음에 등을 떠밀어준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모르는 사람, 여러 사람에게 둘러쌓였을 때 벌어지는 좋은 영향과 사건들이 있는 것 같다. 이번 시합 같은 경험을 다시 못하게 될 지 앞으로도 계속 될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팀워크의 경험이 준 기쁨을 충분히 누리는 것일뿐. 


참, 좋았다 그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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