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의 여성관원들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댄(?) 시기가 있다. 두서 없이 아무 말이나 편하게 꺼내며 다가갔던 건 아니고, 막 친하지는 않더라도 얼마 동안 인사 나누며 지냈다면 이 질문을 꼭 했다는 뜻이다.
“시합 나갈래요? 꼭 잘 하지 않아도 돼요. 져도 다 경험이죠.”
“이 기회에 팀워크도 쌓고 해보는 거죠. 재미있게 나갔다 와봐요!”
영업사원 같은 멘트들. 경험을 독려하는 저런 말들을 시도때도 없이 하게 되는 것이 꼭 일본만화에 나오는 열성 운동부원 같았다. “거기 자네, 정말 시합을 잘 하게 생겼군. 혹시 전국대회에 출전해 전국제패를 이뤄볼 생각 없나?” 약간 이런 느낌의, 터무니 없는 꿈을 진지하게 내뱉는 감정 과잉의 캐릭터같았으려나. 지금 생각하면 이제 갓 검도를 시작한 지 몇 개월 혹은 1년차가 갓 넘은 사람에게, 그간 수련하면서 쌓인 관심의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주문을 한 걸까 싶어 미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호시탐탐 집요하게 팀워크의 기회를 노렸다. 내 입장에서는 얼마 없거나 혹은 아예 없는 여자 관원을 늘상 기다리는 외로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도장에서 열심히 수련하는 편이니까 나를 예뻐해주시는 사범님이나 선배님들은 종종 있었다. 그 사실이 몹시 좋았다.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들어서, 유단자 여성이 입관문의라도 해온다 치면 운동 메이트가 생길 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괜히 신이 나 몇 마디 나누다가 “같이 시합 나갈래요?”라는 말이 주책같이 튀어나왔다.
서툰 나의 질척거리는 노오력은 어느 정도 통했던 것 같다. 지금 다니는 도장에서 몇 번의 단체 팀을 꾸려 시합에 나가보긴 했으니 말이다. 아이 엄마인 유급자 분과 가끔 운동하러 도장에 들렀던 대학생, 갓 초단을 땄던 회사원과 프리랜서 통역 일을 했던 유단자, 때로는 성인부의 인원 구성이 영 되지 않아 갓 중학생이 된 여자아이를 끌어들이기까지 하는 등등. 그렇게 결성된 단체전 팀들은 하나같이 출전 횟수를 1회 이상 넘기지 못했다.
급조된 팀에 참가한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애써 시간을 내어 시합에 나왔다면 몇번 이겨보기라도 해야 재미있을텐데. 시합에 나오는 상대 팀들은 숙련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시합 결과가 사실 뻔했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던졌다가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계란의 마음이 될 것이니.. 이하 묵념.
시합에서 이기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그 경험을 쌓으려면 수없이 져봐야 한다. 수없이 질 만큼 몸과 쏟기에 이 현대사회의 생활이란 건 다들 바쁘고 번거롭다. 스스로 하고 싶어진 게 아니라면 옆에서 아무리 같이 하자 해도 무소용. 나는 어느 때부턴가 권태기에 접어들어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뎌진 사람마냥 애써서 사람들 끌어모으는 걸 잘 안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도장 남자선배들을 대상으로 혼성 시합 제안을 하게 된다는 게 좀 웃긴다면 웃긴 일이지만..
아이러니한 건 함께 시합하러 나간 사람들은 매번 바뀌었을지라도, 시합장에서만 만나는 다른 도장 언니들은 계속 마주치면서 구면인 사람들은 늘었다는 점이다. 곁에 사람을 두는 건 실패하는데 멀리서 연결감을 가질 만한 사람들은 자꾸 만나게 되는 식이었다. 전에 다니던 도장에서 만난 언니도 있고, 어쩌다 시합의 대진상대로 계속 마주친 사람도 있다. 여자들만 출전할 수 있는 미르치과기 전국 여자검도대회에 가면 그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전국 단위로 넓어진다. 다소 어색하더라도 구면이니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합 힘내세요!” “아까 2코트에서 시합 하시던 거 봤어요. 완전 잘 하시던데요?” 같은 북돋움의 인사말도 오간다.
그런 사소한 말들이 다 뭐라고. 그런 대화를 서로 나눌 때는 오래된 친구한테 응원을 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버린다. 어쩌면 여기 모인 여자들은 어쩌면 각자 자기 도장에서는 나처럼 혼자 여자인 경우가 많은 사람들이려나. 그런 생각이 들면 혼자 시합에 와서 쩔쩔 매는 사람들을 볼 때 나 자신을 돕듯 손 내밀고 싶어졌다. 혼자 시합하러 와서 시합영상 찍어줄 사람이 없다면 내 핸드폰으로라도 시합 영상을 담으며 이름을 부르고 화이팅을 외쳤다은 마음. 이 또한 오지랖일까. 몇번의 인사 끝에 구면이 된 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렇게 한 적이 있다. 잠깐의 친절일 뿐이지만, 그래도 손은 내밀지 않는 것보다 내미는 편이 훨씬 좋다.
미르치과기 검도대회에 출전하는 1부 실업선수들의 시합을 친해진 사람들과 구경하기도 했다. 본인들이 사갖고 온 간식거리를 내 손에도 쥐어주면, 같이 입안에서 우물거리며 선수들의 시합을 구경하는 것이다. 실업선수들의 싸움은 우리같은 아마추어 일반인들의 시합과는 박력부터 다르다. 공격 하나를 하려고 뛰어드는 순간 선수들 특유의 발구름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타앙 울린다.
그러면 그걸 보며 그 언니들과 나는 “와아" 하고 추임새를 넣듯 감탄하고, 지나가는 심판분이 “간식 드시지 마세요"라고 하면 “앗 네” 하고 바로 조용해지는 듯하다가 시합안내 책자로 얼굴 앞을 가리고는 다시 간식을 먹으며 시합을 구경하는 식이다. 어울려 수다를 하다 보면 시합이 마무리되거나 곧 각자의 시합 시간이 다가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잠깐 친밀해졌다가 또 멀어지는 사이. 그래도 다음 번 시합장에서 만나면 또 정답게 인사를 나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