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 Jul 27. 2020

졸지에 검도 난민(?)이 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어느 여름의 저녁. 도장의 출근도장을 꾸준히 찍는 관원들이 도장 근처의 카페로 모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정 빈도 이상 도장에 출몰하겠지, 그런 식의 확신이 드는 사람들. 보통 이 시간에는 삼삼오오 도장에서 도복을 입고 모일 터였지만 이날은 달랐다. 늘상 함께 죽도를 부딪히던 시간에 평상복을 입은 채 카페에 모였던 것이다. 평소 칼을 들던 사람들의 모임이니 원탁의 기사들끼리 중대사를 결정하는 비밀회합 같은 느낌(은 아닙니다). 


나까지 도착하니 중년 남성 5인에 장년 여성 1인의 조합이 돼 있었다. 3단 S선배님까지 오셨으면 완전체였는데. 검도가 아니라면 이런 인원 구성으로 모일 이유가 잘 없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저녁시간을 공유하며 칼을 맞대온 수련 동지들. 우리끼리는 어색하지 않았다.


모임의 이유는 앞으로의 수련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두 달 간 수련이 멈춘 바 있고, 이후 주1회로 조심스레 수련을 이어갔지만 뉴스에서의 코로나 확산 상황이 계속 안좋아졌기 때문이다. 사설도장들의 경우 대부분 운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역구의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우리 도장의 경우 제고의 여지가 없었다. 주1회 수련도 더는 할 수 없을 터였다.


운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왜 이렇게들 진지해지는가.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수련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 같은 게 있다. 어딘가 다치더라도 호구는 안 쓸망정 죽도를 쥐고 거울 앞에서 기본동작 자세라도 점검하던 사람들. 부상마저 꺾지 못한 나와 선배들의 검도 수련욕구가, 자연재해 앞에 꺾일 날이 올지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것이다.


선배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어짜피 결론이 같다면 함께 수련해온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며 대화하고 싶다고. 답답한 심정이라도 나눠보고 싶은 마음. 모인 선배들 대부분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막상 만났을 때 그리 긴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이곳 도장이 기약없이 닫히는 동안 다른 도장을 다니는 것도 좋겠다고, 지도사범 역할을 하는 5단 Y사범님이 설명했다. 오랫동안 검도장비를 방치할 수 없으니 장비들을 각자 정리해 가져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런 시국이라 해도 검도를 계속 하고 싶은데. 이런 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안다. 우리의 수련 때문에 만에 하나의 상황이 생긴다면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니까. “주1회 정도라도 가늘게 쭉 가면 안될까요..? 정말 안되나요?” 나의 내적 외침은 가닿지 않았고 반전은 없었다. 


수련의 일상이 언제 다시 시작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근 손실이 올 것이다. 실력이 퇴보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실력 이상의 것들. 이를 테면 여기 사람들과 계속 어우러지며 이어지던 일상의 이야기가 흔적도 없이 흩어질 지 모른다. 욕심내고 전진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라질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되어 마음이 가라앉고 말았다.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 이후에는 저녁 식사(아쉬움이라는 마음의 허기 탓인지 나는 다른 선배님이 시킨 밥도 ‘주신다면 마다 않지요' 하며 뺏어먹었고..). 그러고는 다들 수련 때 사용하던 검도 장비를 챙기러 다시 도장으로 향했다. 도장에 도착해 호구 거치대 앞에서 각자 짐을 챙기던 찰나. “우리 한달에 한번은 모여요. 비접촉 체온계도 장만하고, 출석부도 만들어서요. 손 소독도 잘 하고요” 5단 K사범님이 말을 꺼냈다. 


그 말이 나한테는 난파 직전의 배에 탄 사람들에게 던져진 구명조끼 같았달까. 역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이렇게 흩어지는 건 역시 아쉽잖아요. 사범님의 말에 호응했다. “그래요, 한달에 한번은 모여요! 손도 잘 닦고 조심하면서 만나봐요!” 그러자 “그러면 호구 그냥 두고 가야겠다.” 하며 몇몇 분들이 가져가려던 호구를 자리에 두었다(아마 대부분 시합용으로 호구를 한벌 더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덕후들). 


그러면서 선배들끼리 웅성웅성 스몰토크가 이어졌다. “샤워는 어떡하지?” 옆에서 내가 말했다. "어차피 여자는 저 한 명밖에 없어요. 저 쓴 다음에 샤워실 쓰실래요?”


서로 엄청 끈끈한 관계는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저녁의 시간과 검도장이라는 공간을 공유해온 사람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냥 그만 만나자, 보다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만남을 이어가보자. 이런 식의 결말로 마무리됐다. 왠지 안 좋은 결말로만 끝날 줄 알았던 드라마에 약간의 반전이 생긴 느낌. 


나중에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3단 S선배님과는 전화 통화를 했다. 이미 그날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던 선배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도장을 완전 닫지 않고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은 의지가 있는 상황이라면, 계속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네요.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보려고요.”


좋은 결말만 기대하고 발을 빼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잘 안 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라는 말을 듣다니. 그 사실이 왠지 좋았다. 일단은 몸에 이곳저곳 다친 통증이 있으니 통증도 다스릴 겸 근력운동 같은 기본운동에 집중하고, 공터 같은 데에서 죽도를 휘두르며 기본동작을 하는 나날로 꾸려보자는 계산이 섰다. 


우리의 일상은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일상이 어떻게든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도 나중엔 없어질까. 잘 모르겠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 보트 피플이 된거야?” 

“푸하하하핫! 그러네요. 영락없는 검도 난민이네요.”


도장을 향해 다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했던, K 사범님과의 대화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라진 관원의 존재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