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밖 노동자의 더딘 회복과 실패의 이야기
1. 실패하는 나에 대해 쓸 요량이다. 2. 주말의 시작.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일했다. 정말 필요하다 싶은 일들을 리스트업하고, 그 외에는 거절하거나 응답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목록에 적힌 일들을 기계적으로 훅훅 쳐낼 수 없다.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과정, 그 일 안에서 길을 헤매는 과정까지 포함하여 일에게 나를 내어줘야 그 굵직한 것들이 끝나기 때문에. 과정에서의 소모는 작기도 크기도 하다. 놀고 싶다가도, 놀면 잉여 에너지가 넘실대며 무용한 감각에 흠뻑 빠지다가도, 곧이어 시간의 손실에 조급해지고 어쩌면 얼마 안 되는 시간 차로 생기는 일처리 마감의 여파로 다음 일정이 순조롭지 않아진다. 일을 빨리 해야 할텐데. 그래야 한참 동안 멈춘 글과 그림작업을 병행할 짬이 생기거나 온전히 시간을 내어줄 텐데. 하나하나 천천히 쳐내고 있지만 그 일들의 뒷편에는 실패더미들이 빽빽히 들어찼다. 3. 작업 앞에서 한참 멈춰있다. 한주는 몸이 아팠고 그 다음주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 다음주는 바빠서 여력이 안 나는 나날. 한달 여의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이토록 오랫동안 계획대로 안 움직이는 나라니. 잘 쓰던 못 쓰던 기계적으로 자리에 앉아 뭔가를 쓰던 나인데 이렇게 오래 멈출 일인가. 스스로 말하는 즐거움도 잊고, 누군가에게 닿던 닿지 않던 소중히 와닿은 사소함을 풀어내는 입도 단단히 닫혔다. 회복을 겨우 한 다음에는 스스로에게 천천히 다짐시키는 나날이다. 다만 그게 나의 한계를 고착화시키지 않는 방향과 나를 아예 잃어버리고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을 내뱉는 맹탕이 되지 않는 그 어디쯤을 잘 살펴야 한다. 조금씩 나아지다가, 또 멈춘다. 멈췄다가 다시 조금 움직인다. 목표지점까지 무슨 수로 이뤄낼런지 막막하지만. 지금 이게 나의 속도. 멈췄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대단해, 라며 스스로에게 말을 건냈다. 크게 기대하며 해나가고 싶진 않다. 다만 집중하여 뭔가를 만들어내는 시도를 할 첫날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작업에 익숙해지려 하는 순간에 곁에 있어달라고. 도움 요청할 사람을 생각해둬야지. 겨우 간간히 작업한 리소만화를 배송하며 받았던 기쁜 피드백을 떠올려야지. 조금조금 움직일 그 순간을 위해 최대한 맛있는 것과 예쁘고 타건감이 경쾌한 키보드도 장만해야지. 4. 지원사업 처리 관련. 결제를 하다 생긴 자잘한 실수에 고개를 푹 숙였다가 실수를 알아채고 다시 수습할 때는 어쩐지 좀 뻔뻔해졌다. 상대가 나에게 불쾌감을 혹시 갖더라도, 일의 전체 맥락으로는 수습할 방법이 다 있으니까. “아 그렇군요” 하며 뻔뻔해지는 부분에서 조금 편해졌다. 예전만큼 ‘동료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크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미움받아도 상관 없다’ 같은 생각도 든다. 크게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 주는 해방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상할까. 그 와중에 지원사업 행사 관련으로 주문했던 다과를 상상 이상으로 예쁘게 포장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알아서 챙겨주는 마음. 섬세함. 덕분에 누리는 즐거움. 다과를 예쁘게 찍어준 사람도 고맙고. 5. 지원사업의 취지로 말하는 ‘마을’이나 ‘공동체’가 나에게는 끈덕지고 계속 곁에 있는 사람들로서의 의미로 다가오진 않는다. 초면부터 ‘친해지자’ ‘가까워지자’를 외치는 구호는 내게 맞지 않는다. 사업에서 내건 가치에 해당하는 경험이 없는 나로써는 그 친해짐이 누굴 위해서인지, 그 친해짐이 실제 벌어지는 과정에서의 노고가 구성원 간에 고루 분배되는지 등, 여러가지가 모호한 채로 실행되거나 독려되는 게 이상하게 다가온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의 사항은 있지만 실행자가 처한 지역적 맥락이나 그 맥락에 맞는 실무의 특성은 그 주의사항에 별로 고려되지 않는 듯하다. 이 과정에 매몰되면 현장 실무자들이 일의 본질에 집중하기 보다 행정의 감에 내 일 감각을 맞추게 된다. 일에 몰두하기에도 빠듯한데 일하고 있단 사실을 증명하는 데 골몰하는 에너지가 이렇게 하드코어하게 소요된다니. 당연한가, 싶다가도 민간 부문에서는 탄력있게 처리됐던 여러 순간이 떠올랐다(여기서 ‘탄력있게’가 대충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6. 올해 사업을 하며 좋았던 것은 사소한 순간이다. 천천히 오래 보면서 가볍게 ‘공간에 뭐가 바뀌었네요’ 말을 건네기도 하고, 차라리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물건을 하나 더 사주고, 그렇게 드문드문 오가다가 관련 사업을 진행할 때 그 이웃에게 예산이 돌아가게끔 써주는 거. 무심코 연을 이어가다가 어느 날 카페 사장님이 의자를 버린다는 말에 “어? 그러면 저 이거 가져갈게요.”라 말하면 별말 없이 “버릴 때쯤 DM 드릴게요”라는 답을 듣는 정도의 관계망. 자잘하나 무리없고 각자의 생활패턴이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순간순간 얽히는 관계들. 각자의 답을 갖고 느슨한 리듬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서로를 배려하고 감당하기에 적절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7. 보통 토요일에는 놀기만 하는데 오늘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애인에게 일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일을 하고 그는 유튜브로 주식공부를 하고. 나는 오늘의 나에게 이런 것들을 허락했다. 점심과 저녁은 맛있게 먹을 것. 저녁 이후에는 영화 한 편을 볼 것. 함께 하는 일정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음에도 그 잠시의 짬을 같이 해준 애인에게 좀 고마웠다. 8.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두 번째로 봤다. 두 번 봤는데도 또 울었다. 애인은 옆에서 질질 흘리는 콧물눈물을 닦아주며 “우럭?”을 연발했다(위로와 아재개그 중 하나만 해라 이 사람아). 영화 내내 아쉽고 안타까웠던 건 베이징 생활에 힘겨워하는 젠칭이 샤오사오와 아버지가 내미는 손을 자격지심때문에 외면하거나 져버리는 순간들. 자신이 가장 초라한 순간에 함께 하려 손내민 사람들과 그저 따뜻한 밥 한끼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런 순간마져 인생의 따뜻함을 누릴 다시 없는 기회였을텐데. 9. 이렇게 글을 끼적거리는 걸 보면 그나마 회복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신호 같다. 한동안 무슨 말을 하거나 글을 쓰고 싶어도 그 언어들이 목구멍이나 피부의 언저리에 맴도는 것 같았어서.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토해내지 못 했다. 애써 토해내는 글도 바른 어린이식의 결론으로 끌고 나가는 듯하여 나 아닌 걸 연기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