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과 자만에 사로잡힌 나
나는 내가 잘생긴 줄 알고 살았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못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무한 칭찬세례
낯선 이의 허울뿐인 빈말
길을 걷다 우연히 반사된 45도 각도로 보이는 나
헬스 후 샤워장 거울에 비친 내 젖은 모습 등
근거 없이 내가 마음에 드는 모습만을 기억해 온 결과였다.
그럼 나는 나르시시스트였던 걸까?
요즘 사람들은 이를 '나르'라고 표현하며
사회에서 잘난 척하는 혹은 남을 조종하는 사람을 지칭하곤 한다.
특정 인물의 외형이나 성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인데 사실 이건 올바른 구분법이 아니다.
즉 잘난척하지 않는, 남을 조종하지 않는 '조용한 나르시시스트'들이 더 많다는 뜻
나르시시스트의 핵심 본질은 '이상화된 나'가 존재하느냐의 여부다.
이를 판별하기 위해선 1. 객관적인 나를 무시하고 / 2. 상상 속의 나를 고집하는 지를 따져야 한다.
대개 객관적인 지표들은 수치화된다.
외형을 예로 들어보자
얼굴의 크기, 신체의 비율, 이목구비의 대칭성은 어떠한가?
SNS의 팔로워 수, 학창 시절 고백받아본 횟수, 주변 친인척의 긍정적인 피드백도 들 수 있다.
재산이나 능력은 말이 필요할까?
지능, 성실, 선행, 사회성 등 모든 지표는 그게 타고났든 타고나지 않았든 객관적인 결과로 남는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객관화된 수치를 회피하며 진짜 나에게서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동시에 타인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
'이 정도도 괜찮다'는 긍정과 함께 상상 속의 창조된 나를 지키려는 과정, 이를 나르시시즘이라고 일컫는다.
나르시시스트들은 1. 이상화(Idealization), 2. 투사(Projection), 3. 회피(Avoidance)를 동원하는데,
쉽게 말하면 1. 허영, 2. 남 탓, 3. 외면로 치환할 수 있다.
필요 이상의 돈을 투자하여 옷가지나 액세서리 혹은 차량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이나 인맥 등을 과장하거나 지어내는 사람들은?
사실 위와 같은 유형은 공격적으로 자기 자신을 가장하기에 이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문제는 남 탓과 도피다.
부모, 남편, 자식들 때문이야 / 상사, 부하직원 때문이야 / 사회와 정치가 썩었기 때문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 저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 혼자가 편해서
조용히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합리화는 자신도 이게 도망치는 행위인지 자각하지 못한다.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아닌데? 이건 정말 내 탓 아닌데?", "이건 유전적 한계 맞는데?", "그럼 뭐 다 참고 살라는 말인지"
그리고 당신 말이 맞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내 탓인 건 없다. 반대로 오로지 남 탓인 것도 없다.
누가 부자이고 거지이며, 잘생기고 못생겼는지 정할 것인가?
핵심은 진짜와 이상 속 나의 괴리다.
앞서 말했듯 어쩔 수 없이 자연과 사회 속에서 나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정해진다.
문제는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상상 속으로 도망칠 경우
자신을 갉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데 있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나르시시즘은 유전적 형질과 성장환경에서 비롯된다.
타고나기를 편도체가 과활성 되거나 도파민 수용체의 민감도가 불안정할 경우 정서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민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특질은 유전율이 약 30~50%에 달한다고도 연구되었다. (Torgersen et al. 2000)
여기에 더해 성장환경에서 과잉된 기대를 받거나 부모로부터 수용받지 못할 경우 취약한 진짜의 나를 숨기고 자연스럽게 가상의 나를 창조하게 된다. 즉 압박에서 살아남기 위해 회피와 과장이라는 자기 방어를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심리적 붕괴를 막기 위해 방어기제를 활용한다. 정신이 무너지면 자아가 분열되거나 자살로 이를 수 있기에 가장 연약할 때의 내가 망가지지 않고 버티려다 보니 그 관성으로 나르시시즘이 이어지는 것이다.
정리하면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도 나르시시즘의 일부였다.
사회적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그런 나도 괜찮아. 인정하고 내 삶 살게'로 이어져야 했다.
연약했던 나는 세상의 기준을 버티기 힘들어 도망쳤고 또 나를 가장했다.
감당 불가능한 운동에 도전한다거나 필요 이상의 옷을 사고 거짓과 허세를 부렸다.
재밌게도 오히려 그런 특성 때문에 더 발전하기도 했다.
괴리를 채우기 위해 야근과 공부를 하고 승진과 성취를 이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은 나와 주변인을 병들게 한다.
희박한 확률을 뚫고 파멸적인 성공을 하지 않는 한 상상과 실제의 괴리는 좁혀지지 않으며
필요 이상으로 자원을 소비한다. 더불어 진실되지 못하니 깊은 관계로 빠져들지 못한다.
못난 나
이런 나를 내가 안아주지 않으면 누가 안아주랴.
그래도 앞으로는 남 탓을 한다거나 거짓으로 꾸며내진 않으려 한다.
그게 나를 진짜 사랑하는 자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