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품던 양파, 달고도 아린 그 맛을 몸과 마음에 담으며
기다란 줄기가 휙휙 스러진 양파밭.
이제 그만 땅에서 거두어 달라고 신호를 보냅니다.
둥근 자태가 거의 드러난 양파는 뽑기가 쉬웠어요.
“뽁뽁, 뽀드득~.”
수염뿌리가 땅속에서 벗어나는 소리가
귀엽고 다정하게 들립니다.
한 손에 잡힐 만한 크기.
이 정도면 딱 마음에 들어요.
그보다 작은 것도 꽤 나오지만
제 마음에는 대풍입니다!
줄기에서 잘라낸 양파를 말려서
망에 차곡차곡 담았어요.
한두 달쯤은 우리 집 밥상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또 양파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예상치 못한 풍요로운 수확을 마치고
참 오랜만에 책상에 앉았어요.
양파 심을 그즈음에 읽은 책이 여전히 놓여 있네요.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
제목부터 은근히 끌리던 책이었어요.
마음에 닿는 내용이 많아서 공책에
여러 문장을 옮겨 적었더랬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변치 않고 좋아하려면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은 단순하다. ‘계속’하는 것이다.” (33쪽)
농사 앞에만 서면 늘 작아지곤 하지만요,
책 속 이 문장이 새삼 기분 좋게 눈에 다가오네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왠지 양파 농사를 변치 않고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바로 시간이다. 그 안에 하루하루를 연결하는 가늘고 긴 감각이 있다. 결과보다 과정에서 얻는 확실한 기쁨, 가치 있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긴장감,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동감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50쪽)
“반복된 성공과 꾸준한 실패는 포기하지 않을 때에만 경험할 수 있다. 오늘같이 반쯤 실패한 날도 나쁘지 않다.”(123쪽)
그동안 양파 농사 제대로 된 적이 거의 없었어요.
이번처럼 주먹에 쏙 안기게끔 크게(!)
자란 건 진짜 오래간만이랍니다.
그전엔 자두 크기만이나 했으려나요.
양념으로 쓰려고 기른 건데
거의 장아찌로 만들어 먹곤 했답니다.
그럼에도요,
늦가을부터 다음 해 초여름까지
양파가 자라는 모습과 함께하는
그 시간과 과정들은 책 속 글귀처럼
“기쁨, 긴장감, 생동감”을 차근차근 안겨주곤 했어요.
수확이 무척이나 초라할 때
‘실망감’이 보태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후회한 적은 없었답니다.
꾸준한 실패 덕분에 “반복된 성공”은 아니지만
‘어쩌다 성공’은 맞이할 수 있게 된 듯해요.^^
양파를 거두었으니 맛을 봐야죠.
햇양파 껍질을 벗겨 냅니다.
말간 속살이 광채가 나네요.
만져 보면 얼마나 딴딴한지 몰라요.
손에 쥐니 꼭 야구공 잡은 느낌이에요.
쓱쓱 썬 양파를 곧바로
입에 쏙쏙 넣습니다.
딴딴한 몸이 품고 있는
아삭거리면서 달고도 아린 맛.
진짜로 (매워서) 눈물 나게 맛있어요.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라는 책.
옆지기가 권하여 읽기 시작한 뒤로
이 제목이 불쑥 떠오를 때가 많았어요.
당장 하는 일이
지겹고 어렵고 버거울 때면
‘과연 이 상황은 단정한 반복일까, 무의미한 반복일까’
여러 번 되뇌곤 했답니다.
농사나 산골 살림살이 앞에서 자주 그러했죠.
그때마다 답을 내리기가 참 어려웠어요.
그림이 주업이면서 글도 쓰며 사는
프리랜서 작가 봉현.
그이가 발행하는 뉴스레터
‘봉현읽기’도 받아 보고 있는데요.
뭐랄까 이 작가는 (글자로만 보기에)
너~무 열심히 사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양만큼 해야 할 일을 엄격하게 해낸다.”(51쪽)
“내게 맞는 기본이 무엇인지 아는 일은 생활에 안정감을 선사한다.”(153쪽)
해야 할 일을 엄격하게 해내고
내게 맞는 기본이 무엇인지 알기.
이거 정말 어렵지 않나 싶어요.
‘해야 할 일’보다 ‘자유의 양’이 많으면 좋겠고,
내게 맞는 기본을 몰라도
생활이 부드럽게 굴러가길 바라는 이 마음.
빡빡한 세상살이에 아무래도
욕심쟁이 심보일 것 같으면서도
그 바람을 쉽게 내려놓지를 못하고
살아요, 아직도, 제가요~ ㅠㅜ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를
오랜만에 열었다 덮으면서
어떤 소망이 피어나네요.
단정하고, 자유롭고, 행복하며
되도록 약간만 힘든 반복.
그런 다양한 되풀이가 어우러진
‘조화로운 반복’으로
하루하루를 만나고 싶다고요.
청소하고 빨래 돌리고
이불 햇볕에 널고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고
이메일을 주고받고
풀을 (조금만) 매고
농사지은 양파를 먹고
마음을 글자로 새기고….
여러 가지 되풀이들이
전과는 살짜쿵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 이 하루는
어쩌면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도 같아요.
내일도 제 앞에 다가올
조화로운 반복을
설레는 맘으로 맞이해 보렵니다.
단조롭던 제 마음을
다채롭고 풍요하게 채워 준
산골 양파님, 봉현 작가님
모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