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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May 28. 2020

‘누가 나를 쓸모 있게(?) 만드는가’

제철 여름 김치, 열무김치를 담그며

40일이면 자란다는,

오월 넘기면 질겨서 안 된다는 열무.


자연이 이끄는 대로 

여기서 겪으며 배운 대로

유월이 오기 전 

열무를 뽑고 김치를 담갔다. 


그리 많이 심지는 않았는데

산골부부 두 사람 손발이 움직여도

뽑고 다듬고 씻고 절이고 무치기까지

하루가 훌쩍 지난다. 

꽤 많이 힘이 든다. 

김치 만드는 노동은 언제나 그런 법. 


유월이 오기 전 열무를 뽑았다. 다닥다닥 붙어 자라느라 힘들었는지 열무 뿌리가 참 얇고 길다.


농사짓고 거두어 갈무리하기.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일임을 

몸으로 마음으로 알게 된 것 같다고 

여긴 때가 있었다.

그렇기에 철없는 귀촌살이를 담아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 같은 책도 

참말 용기 있게 펴내기도 했다.


산골에 살자면 

여기서 사는, 계속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자면 

자연의 시간 따라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래야 맞는데 

언제부턴가 그 노동이

쓸모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먹고 살’ 반찬거리는 조금 생길지언정

‘먹고사는’ 일에는 당최 도움이 안 되는 듯하고,

사람 그림자는 없이 오로지 땅만 하늘만 바라보며

쳇바퀴처럼 몸을 부리는 시간들이

왠지 ‘몸부림치는’ 순간처럼 다가왔다.

한동안 그 작은 몸부림마저 접어 버렸다.     


몸 노동을 그친 대신 

진한 감정 노동이 뒤따랐다. 


산골살이 일곱 해를 넘겨서야 

나도 모르게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이 마음은

대체 ‘귀촌 사춘기’인가, ‘귀촌 갱년기’일까

혼자 우스개처럼 생각도 해 보았으나

그 정체를 알 도리는 없이

시간은 흐르고 열무는 쑥쑥 커 갔다.  


뽑고 다듬고 씻고 절이고 무치기까지  하루가 훌쩍 지난다. 김치 만드는 노동은 언제나 힘이 많이 든다.


열무 밭은 옆지기가 고이 만들었고

열무 씨는 소중한 동무가 뿌려 주었고

물은 하늘이 비님에 실어 보내 주었다.


싹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않던 나는

열무가 다 자란 이제야 그 앞에 선다. 


쏙쏙 잘 뽑힌다.  

살갗을 따갑게 건드리는 이파리가

밉기보다는 참 싱그럽고 좋다.   


얇고 길쭉한 뿌리한테는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솎아 주기를 하지 않아서

다닥다닥 붙어 자라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제 몫을 다해 주었으니. 


내 마음이 힘겹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열무는 쑥쑥 자랐다.


한 이랑쯤 되는 열무를

좍 거두고 보니 밭이 훤하다.

마음까지 흐뭇하게 시원하다.


내 마음에 뿌리내리려 기를 쓰던

어두운 감정 덩어리들도

열무 따라 어느만큼은 뽑힌 듯한 느낌.

“느낌이 중요해~ 난 그렇게 생각해~♪”

뭐, 요런 노래도 떠오르면서.^^ 


시간이 지나 푹 잦아든 열무김치를 맛보니

아삭아삭하고, 달지 않게 맛있다.

이걸 맛나게 먹어 줄 얼굴들이 떠오른다.


여름 김치의 대명사 열무김치. 아삭아삭하고 달지 않게 맛있다. 왠지 다가올 여름이 두렵지 않다.


열무가 자라고 거둬야 하는 때가 

자연의 시간표처럼 정해져 있듯이,

귀촌 사춘기이든 갱년기였든 그게 뭐든

사람 마음을 파고드는 감정도

다 찾아오고 떠나는 때가 있기 마련일까.


아... 돌고 도는 인생이라더니

뭔가 변증법스럽게시리

뒤늦게, 새삼스레, 또다시, 느낌이 온다.  

알 것도 같다. 


자연에 기대어 농사를 짓고 

먹을거리를 거두어 내 살림을 꾸리고 

다른 이와도 함께 나누는 일.

그거참, 쓸모 있는 노동이자 삶이라는 것을!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어쩌다(실은 자주) 내가 보낸 오늘 하루가

처량할만치 하찮게 느껴질 때면 

이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부제가 참 멋들어진 이 책. 


‘빼앗기고 잃어버린 인간 능력과 창조적 삶을 회복하기 위해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를!’


뒤표지에 있는 글귀도 엄청 와 닿던 이 책. 


어쩌다(실은 자주) 내가 보낸 오늘 하루가  처량할만치 쓸모없게 느껴질 때면   이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열무김치 한 가닥 입에 물고

찬찬히 책 제목을 바라보다가 

대뜸 드는 생각. 


‘누가 나를 쓸모 있게(?) 만드는가.
열무와 함께한 노동,
열무김치를 맛있게 먹어 줄 사람들,
또 나를 밭머리에서 애써 몸 부리게 만드는 자연, 자연의 시간...’


‘청계천 8가’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데,

꼭, 굳이, 쓸모 있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으면서도 

저 알아서 불쑥 찾아와 준 요런 생각은 

반가운 손님처럼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여름 김치의 대명사 열무김치가 맛나게 익을 때쯤

서툰 내 생각도 조금 더 알차게 익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잘 익은 김치 함께 나눌 한 사람 또 한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김치 통을 냉장고에 담는다. 

다가올 여름이 왠지 두렵지 않다.


“직접 기르고 거둔 채소로 제철 김치를 제철에 담그기.
쓸모고 뭐고 다 떠나서 그것만으로도 기특하다, 잘했다!”   


참말 오랜만에 나를 칭찬해 준다. 

내가 나한테 엎드려 절 받는데도 기분 괜찮구랴~   


내친김에 어릴 때 본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제목 따라 하기.


“그래 가끔 칭찬을 하자, 누가? 내가, 누구를? 나를! ^^”                      


열무를 뽑으며 어두운 감정 덩어리들도 같이 뽑힌 듯한 이 느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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