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기 웹툰을 보는데 죽고 싶다는 친구와 그걸 말리는 주인공의 대화가 아주 현실적으로 나타난 부분이 있었다. 친구의 말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픈 것도 아니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며 겪어야 할 즐거움과 고통에 더 이상 새로움도 없고 똑같은 시간을 그저 살아있으니까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어느 순간 너무 지쳤다. 그래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이지 못한 이유에 수많은 네티즌이 공감을 표하며 저 마음을 알겠다고, 자신도 똑같은 마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정말 심란했다. 나 역시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짧은 내 지난 인생엔 즐거운 순간도 많았지만, 힘들고 어려운 걸 이 악물고 견뎠던 시간도 많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마틸다처럼 묻고 싶었다.
“사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가요? 아니면 어릴 때만 그래요?”
내 주변에 레옹은 없었고 대신 다른 어른들의 대답은 항상 그랬다.
“야, 지금이 제일 인생에서 편하고 재밌을 때다. 어른 되면 그건 힘든 것도 아니야. 얼마나 머리 아프고 힘든데. 학교 다닐 때가 제일 좋지. 어휴, 돌아가고 싶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앞으로 남은 50여 년의 인생이 기대되기보단 그걸 버텨낼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또 일어날까?’ 보다 ‘아빠가 퇴직한다면?’, ‘그래서 우리 집에 이제 안정된 수입이 없어진다면?’ 같은 걱정이 진짜 현실 같았다. 그리고 그런 우울한 걱정이야말로 내가 철이 들었고 어른다운 어른이 되었다는 표식이었으므로 절대로 미래를 긍정적으로 관망할 수가 없었다.
남들 받는 교육은 다 받고 사지 멀쩡한데도 월 200만 원 버는 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감각은 도대체 무엇일까? 실제 현실이 그러한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현실을 그렇게 인지하고,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부양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빈곤하고 피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와 희망보다 두려움과 절망이 더 분명해 보이는 순간,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새어 나와 대기를 지배하는 스모그나 미세먼지처럼 내 마음을 뿌옇게 만들었다.
유독 잠이 많은 친구 L은 이게 모두 인간의 상상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뉴스를 한 번 틀어 봐. 갑질, 성차별, 약자에 대한 폭력과 그걸 막아줄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취약하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의 좌절감. 그 사실 자체만으로 느끼는 고통이 아니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고통을 훨씬 크게 받아들인다. 상상력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선택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뉴스에 등장하는 피해자들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며 고통받거나, 나는 저런 사회적 약자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남의 문제로 생각하며 무시하고 성공에 아등바등 매달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