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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대한필맨 Jan 24. 2020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슬픔에 허우적거렸던 그때

2002년 월드컵 당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카드 섹션은 온 국민을 빨갛게 물들이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아직도 2002년 월드컵은 많이 회자가 될 정도로 대한민국은 들썩였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동네에서 공 좀 찼던 나는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선수의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지게 된다.

2002년 월드컵 카드섹션


이렇게 보면 완전 해피 엔딩이다. 꿈을 이뤘으니 말이다. 나도 중학교 1학년 때는 축구선수만 되면 꿈을 이루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프로 축구선수가 되는 것도 힘들었지만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 


초등학교 때 시작해서 프로선수가 되는 확률은 0.8퍼센트다. 프로 무대는 각 해의 0.8퍼센트들이 경쟁을 한다.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다. 나는 프로가 되면 별이 되는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경쟁에서 이겨서 꾸준히 경기를 출장해야 되는 곳이었다. 그게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실제로 프로가 되었는데 잊힌 선수가 된다.




나의 첫 프로팀은 FC서울이다. FC서울의 유소년 팀 출신이어서 대학을 가기 전에 우선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FC서울에 입단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암흑기는 시작된다. 



학창 시절에는 저학년 때부터 주전 선수로 뛰다가 처음으로 후보 선수 생활을 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버려진 선수다. 당시 FC서울은 '미래군'이라는 명목으로 U-21세 팀을 K-리그 최초로 만들었다. 당시 나와 후배였던 이광진 선수는 각각 만 24세, 만 22세였다. 즉, U-21세에 부적합한 선수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를 미래 군으로 보냈다는 것은 버림받은 것과 진배없었다. 


시즌 중반에 이광진 선수는 광주 FC에 임대를 가면서 꽃을 피게 된다. 함께 눈물 젖은 빵을 먹었기에 후배의 성공은 내 일처럼 기뻤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고 쏟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깜깜했다.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나는 자전거에 취미를 둔다.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로드'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배경 삼아 밤낮으로 달렸다. 하루는 구리에서 출발해서 영등포까지 왕복으로 다녀온 적도 있다. 그것도 밤 11시에 출발해서 새벽 5시에 타고 왔다. 자전거가 나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왜 그렇게 자전거를 탔는지 돌이켜보면 이렇다. 축구에 대한 자신감은 바닥이고, 자존감은 이미 땅굴을 파고 있었다. 그래서 축구선수라는 타이틀을 놓칠 것 같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잊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를 타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 자꾸 타게 되었다.


2013년 시즌을 마치고 FC서울과 계약을 종료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팀을 찾게 된다. 바로 대전시티즌이다. 당시 대전시티즌은 2부 리그에 강등된 팀이었다. 강등 시즌 막판에 감독 교체 후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기에 2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이 기대되는 팀이었다. 당시 감독님은 고인이 되신 고 조진호 감독님이시다.




나는 이 팀에서는 암흑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푸른 잔디 위에서 관중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뛰고 싶었다. 그게 진짜 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의 암흑기는 계속 진행 되었다. FC서울에 있을 때보다는 상황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경기를 뛰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시즌 절반을 2군에서 생활했다. 그래도 전년도와는 다르게 1군에서 훈련도 하고 엔트리 포함도 10경기 정도 되었다. 버려진 선수에서 후보 선수로 한 단계 올라간 것이다. 


완쪽 2014 시즌 K-리그 2 우승, 2015 시즌 K-리그 1 출전


2014년 시즌은 대전시티즌이 엄청난 퍼포먼스로 조기 우승을 거머 줬다. 엉겁결에 K-리그 2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행운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꿈을 이루는 순간도 맞이 하게 된다. 리그 마지막 경기가 안산 무궁화 FC 원정경기였다. 이미 우승을 확정했기에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고 후보선수들에게 기회를 줬다. 그 경기에는 데뷔전을 치르는 선수가 나와 다른 선수 한 명을 포함해서 두 명이었다. 나머지 선수들도 대부분 10경기 이하로 뛴 선수들이었다.


결과는 1대 1 무승부를 거두면서 나의 데뷔전을 마쳤다.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흰색 원정 유니폼을 입고 안산 와스타디움을 걸어 들어가던 그 느낌은 잊지 못한다. 킥 오프 휘슬소리가 들린 지 얼마되 지은 것 같은데 종료 휘슬이 울렸다. 2년 간의 암흑기를 견디고 얻은 경기 출장 기회는 90분을 9초라고 착각할 정도로 짧게 만 느꼈다. 경기를 뛰면서 든 생각은 나도 경쟁력이 있는 선수라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땅굴을 파고 두더지와 친구가 되었던 자존감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2년 간 뛴 기록은 1경기였다. 이 기록으로는 재계약과 이적을 하기에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시즌이 종료되고 팀을 알아보기 위해 테스트를 다녔다. 당시 창단 팀이었던 이랜드 FC를 비롯해서 부천 FC, 고양 HIFC에서 열린 공개 테스트에 참여했다. 분명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모두 다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 눈을 낮춰서 현재 K-3 격인 내셔널리그 팀을 노렸다. 경주 한수원과 지금은 해체가 된 용인시청이었다. 아쉽게도 자신감은 올라갔지만 나의 가치는 여전했다. 또 계약은 불발되었다.




당시 에이전트 팀장님은 상황이 어렵다며 제2의 인생을 일찍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진짜 내 상황은 사면초가였다.


마지막 테스트 팀이었던 용인시청은 2014년 12월 31일까지 훈련을 했었다. 당시 감독님이었던 김종필 감독님은 따로 나를 부르셨다. 내게 계약은 힘들겠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그 말을 듣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괜찮은 척을 하면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감독님께 한 번 배웠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나왔다.



그날 모든 선수가 계약을 위해서 시청으로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선수들은 계약을 위해 모두 버스를 탔다. 나는 그 버스를 얻어 타서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내렸다. 나를 제외한 버스에 탄 선수 모두가 계약을 하는데 나는 중간에 내려야한다는게 비참했다.


나는 곧장 여자 친구가 있는 대전으로 이동했다. 부모님, 에이전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고속버스 창밖을 내다봤다. 내일이면 2015년이 되고 공식적으로 자유계약 선수가 된다는 생각이 착잡했다. (2014년 12월 31일까지 대전시티즌과 계약 상태였다.) 나이도 27살이 되면서 군대의 압력도 높아지는 시기였다. 축구를 더 도전해야 할지 새로운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여자 친구와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에 바래다준 뒤에 방을 잡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축구 관두면 뭐하지, 군대는 어떡하지,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드리지, 나는 축구를 관둘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음날 아침 여자 친구와 뼈해장국을 먹었다. 밤새 생각하고 정리했던 것을 여자친구에게 전했다. 앞으로 6개월만 K-3에서 있다가 여름 이적시장 때 도전해보고 안되면 군대를 가겠다고 밝혔다. 여자 친구는 알겠다고 응원을 해줬다. 나는 아침을 먹고 운동을 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다음 날 에이전트 대표님께도 전달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에 대전시티즌 주무형이 전화가 왔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형이라 새 해 인사라도 온 줄 알았다.


주무 형은 내일 제주도로 동계훈련 갈 테니 짐 싸서 숙소로 복귀하라는 것을 전달했다. 나는 당황해서 다시 한번 되물었다. "형 장난치지 마요. 이런 걸로 장난치면 안돼요." 주무형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런 걸로 장난치겠니. 진짜야. 오늘 밤 9시까지 짐 싸서 복귀해. 일단 그렇게 알고 오기나 해"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내셔널리그에도 탈락했던 선수가 K-리그 1(클래식)의 선수가 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는 지금 에이전트 대표님께 마지막 도전을 한다고 말씀드리려고 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에이전트 대표님을 만나서 상황을 전달했다. 대표님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대표님은 일단 팀에 들어가서 늘 하던 태도로 훈련에 임하라고 하셨다. 아직 계약서 사인을 한 게 아니니 최대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주문했다.


팀에 복귀했고 다음 날 제주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롤러코스터를 100만 번은 탄 느낌이었다. 동계훈련 기간 도중에 계약서 사인을 할 때 왜 나를 다시 불러들였는지 알게 되었다. 감독님께서는 지난 시즌 우승을 하는데 2군 선수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분위기를 만드는데 가장 일조한 선수를 나라고 판단했고 갈 팀도 없던 내게 기회도 주고자 한 것이다. 내게는 행운이었다. 1부 리그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그랬던 내가 리그 5라운드 만에 울산 현대를 상대로 1부 리그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대전시티즌은 시즌 개막 후 4연패를 기록 중이었고 4경기 12 실점을 기록했다. 결국 감독님께서는 쓰리백 전술을 꺼내 들었다. 내게 김신욱 선수를 전담하라는 주문을 내리셨다. 당시 울산 현대는 3승 1 무로 리그 1위 팀이었다. 나는 이 경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다. 김신욱 선수를 분석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괴롭혀줄 방법을 생각했다. 경기 결과는 1대 1 무승부를 거두면서 시즌 첫 승점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임무를 나름 잘 수행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지난 2013년부터 그때 당시까지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처지나갔다. 그날따라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자꾸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아산 무궁화 시절 필맨 : 출처 서영창

중학교 1학년 때 꿈을 꾸기 시작한 나는 프로 세계에서 2년이라는 암흑기를 견뎌내고 꿈을 이루게 된다. 그해에 총 24경기를 출장(중간에 부상으로 한 달 반을 쉼)을 기록하게 된다. 다음 해에도 충주험멜로 이적 후 31경기 출장을 하면서 진짜 프로축구선수가 되었다.


아직도 2015년 1월 1일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기에 은퇴의 기로에 서있었다. 만약 하부리그에 갔더라면 아산 무궁화에서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커리어를 쌓지 못했을 것이다. 더 이상 무를 수도 없는 낭떠러지 끝에 내몰렸던 내게 손을 내밀어주신 고 조진호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렇게 과거를 돌이켜보니 스스로에게 쓰담쓰담을 해주고 싶어 졌다. 생계형 계약직 선수의 숙명인듯하다. 외롭고 불안하고 지쳤던 순간을 잘 견뎌내고 이겨내 줘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위기는 예고 없이 들이닥칠 텐데 그때도 슬기롭게 잘 헤처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을 최대한 오래 이루어가길 바란다.



#대전시티즌 #FC서울 #아산무궁화 #충주험멜 #MCFC #CC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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