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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대한필맨 Jan 22. 2020

장하다. 내 동생

기뻐서 눈물이 다 났다.

2011년 12월쯤이었다. 친동생의 훈련소 수료식에 참여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 고성으로 갔다. 군대 보내고 처음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목포에서 살았다. 고성은 지도상 끝에서 끝이었다. 아무리 먼 거리였어도 '우리 집 둘째 아들이 잘 지내고 있나', '혹여나 너무 힘든 게 아닐까' 라는 걱정으로 8시간 액셀을 밟았다.


우리 가족은 너무 먼 거리였기에 전 날에 도착해서 숙박을 했다. 당일 날 아침 일찍 수료식 장소에 갔다. 학교 체육관과 같은 곳에서 수료식이 진행되었다. 동생의 얼굴은 훈련병이 소대별로 입장할 때 처음 볼 수가 있었다. 훈련병들은 하나같이 군기가 바짝 든 표정으로 발맞춰서 체육관을 채웠다. 수료식 행사의 마지막은 가족이 직접 계급장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 혹은 남자 친구 앞에 섰다.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는 앞에 계신 부모님께 신고라고 외쳤다. 그러자 체육관은 훈련병들의 신고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충성. 신고합니다. 000 훈련병 김정조는 2011년 12월 0일 수료를 명 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이때 대부분의 이병(수료를 마치고 훈련병에서 이병으로 진급한다.)들은 눈에 물방울이 맺힌다. 어떤 이병은 엉엉 울기도 했었다. 내 동생은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꾹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참는 모습이 더더욱 우리 가족들의 감정을 복받치게 했다. 내 눈도 동생의 눈만큼 눈물이 맺혔다. 


10년 된 사진이라 화질이 좋지 않지만 두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왼쪽 동생, 오른쪽 필맨



내 동생은 어릴 적부터 방황을 많이 했다. 부모님들이 학교에 찾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경찰서도 두 번 정도 갔다. 한 번은 중학생 때 고주망태가 되어서 길바닥에 자고 있던 동생을 누군가 신고했고, 한 번은 학교 수련원에 갔다가 친구와 싸웠는데 코뼈를 부러뜨렸다. 그 외에도 속 썩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랬던 동생이 5주간 훈련소에서 사고 없이 건강하게 나타났다는 게 왠지 모를 울컥을 일게 했다. 




언제가부터 사고뭉치라는 이미지로 인식되었던 동생이 처음으로 늠름해 보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생에게 미안함이 많다. 나와 동생은 세 살 터울이다. 동생의 키가 181cm로 작은 키는 아니지만 내 키는 189cm다. 그리고 축구선수이지 않는가. 아무리 동생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힘이 셀지는 몰라도 내 앞에서는 한없이 순한 양이되었다. 어릴적부터 장난기가 많은 나는 동생을 많이 괴롭혔다. 놀리고 도망가는 게 특기였다. 어떻게 동생을 놀려줄까 하는 게 인생의 낙이기도 했다. 그래도 동생을 잘 챙기려고 했었다. 왜냐하면 늘 집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경제활동을 위해 두 분 다 일터에 나가셨다.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오셨기 때문에 나와 동생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다행히도 한 아파트 단지 안에 외조부모님, 큰외삼촌, 작은 외삼촌, 이모가 살았기 때문에 굶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척들이 챙겨주더라도 둘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다. 동생과 싸울 때도 있었지만 즐겁게 놀았던 기억도 많다. 두 남자아이는 집안에서 축구, 레슬링, 보드게임, 카드게임 등 할 수 있는 놀이란 놀이는 다했다. 그래서 아랫집에서 층간소음 때문에 많이 올라왔다.(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다 내가 축구를 시작하게 되면서 동생은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떠난 사람은 허전함을 모른다고 했던가. 나는 축구부에 적응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고, 함께 해줄 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동생 입장에서는 의지했던 형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 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12살 초등학생 남자아이는 이때부터 외로움을 배우게 된다. 동생은 중학생이 되자 외도를 시작했다.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연락 두절이 될 때도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집안 사정 때문에 이사를 자주 하게 되었다. 광주에서 목포로 이사하게 되면서 동생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때가 동생이 중학교 2학년 때다.


이런 환경이 동생을 정서적 불안을 야기했고 반항아적인 성향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동생의 외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동생을 혼내고 다그쳤다. 나쁜 일을 저지르면 모두 저지른 사람의 탓이라는 고정된 잣대로 동생을 대했다. 동생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고 내가 보고 싶대로 보는 확증편향을 했던 것이다. 어느샌가 동생은 나를 피해 다녔다. 볼 때마다 잔소리하고 다그치는데 나랑 함께 하고 싶었겠는가.




심리학, 교육학 책을 읽으면서 나의 판단이 이대호 홈런만큼 멀리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 본능의 법칙'에서는 인간의 성격은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고 한다. 형성의 시작은 부모의 DNA부터다. 부모의 DNA를 가진 정자와 난자가 수정이 되 태아가 만들어질 때부터는 산모를 통해 외부 자극을 받는다. 유아기, 청소년기를 거쳐서 20대까지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극을 받고 변할 수 있다. 하지만 20대 초반 때까지가 자아가 단단하게 형성되는 시기다. 그 이후에 변화를 바란다면 엄청난 의식적인 노력을 요한다.


내 동생 김정조


내 동생은 우리나라에서 사춘기라고 일컫는 시기에 불안한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형으로서 동생과 함께 하지 못하고 합숙 생활했던 것이 미안하다. 그 시기에 내가 함께 해줬다면 동생의 방황은 깊지도, 멀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였을까. 동생의 수료식 신고를 보자 울컥하게 된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든 5주 기초 군사 훈련을 멋지게 해낸 모습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하다. 내 동생


그 후 동생은 부대에서 가장 사회에 나가서 잘 적응할 것 같은 대원으로 뽑힐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된다. 우리 가족들은 동생의 반전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좋아했다. 제대 후 동생의 삶이 전과는 다르게 흘러가기라 기대를 품게 되었다. 현재 동생은 나름 사회에 잘 적응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남자는 군대를 가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아! 그리고 동생과 나는 현재 누구보다 서로를 위해 주는 형제애를 보여주고 있다.


사랑한다. 하나뿐인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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