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워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중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타 지역 중학교 축구팀과 연습경기를 하기 위해 원정경기를 갔다. 그날따라 가을 하늘은 어찌나 높던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산뜻한 기운으로 운동장에 도착했다. 연습경기 장소는 맨땅이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 학교 운동장은 맨땅이었다. 인조잔디는 전국 대회 준결승에는 올라가야 밟을 수 있었다. 청명한 하늘과 맨땅의 조화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그 그림은 경기 도중 망쳐버렸다.
바로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상대 선수와 헤더 경합을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 이미 탈 중학교 피지컬을 자랑했었다. 15살의 키가 무려 180cm가 넘었다. 평균적으로 선수들은 대부분 170만 넘어도 큰 키에 속했다. 나와 경합했던 선수의 키는 170cm가 안된 선수였다. 당연히 신장 차이로 내가 헤더 경합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 이후에 상황이 벌어진다. 헤더를 하고 내려오는데 상대 선수는 올라오는 게 아닌가. 내 코는 상대 선수 뒤통수도 박아버렸다.
탁!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코에 통증이 왔다. 순식간에 코가 코롱이 처럼 부어올랐다. 순간 엄청난 고통이 일렀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아프다고 교체로 나오는 것은 약한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코피가 났지만 휴지로 막고 다시 뛰었다. 경기를 마치고 코 상태를 확인해보니 코롱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커져있었다. 코를 처음 다쳤기에 그냥 쉬면 나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주일이 흐르자 부기가 빠지면서 콧등이 비틀어져있는 게 아닌가. 감독님께서는 바로 나를 병원으로 보내셨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코뼈가 부러져있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먼저 병원에 가서 경과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뼈가 부러지지 않는 한 병원은 가지 않는다는 이상한 자존심으로 방치한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뼈가 부러져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코 수술을 하게 된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린다. 부분마취를 한 상태에서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 방식은 이랬다. 의사 선생님께서 직접 손으로 콧대를 맞췄다. 그런데 마취가 안된 건지 덜 된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건지 죽을 듯이 아팠다. 아파서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제발 빨리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랬다.
뼈를 맞추고 콧속에 긴 거즈를 넣어서 막았다. 3주간 양쪽 콧구멍을 통해서 숨을 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입으로만 숨을 쉬는 게 엄청난 곤욕이라는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깊게 잠을 못 자고 호흡량도 적어서 머리도 아팠다. 3주가 지나고 병원에 가는 날 너무 기뻤다. 앞으로 코로 숨을 쉴 수 있다는 생각이 행복에 겨웠다. 그때는 몰랐다. 거즈를 빼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콧구멍에서 거즈가 끝없이 나오는데 아프기도 무진장 아팠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한쪽 콧구멍을 겨우 끝냈더니 다른 한쪽도 남았다는 것이다. 사면초가는 여기서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시계는 계속 돌아갔고 남은 콧구멍의 거즈도 완전히 제거했다. 양쪽 콧구멍이 뚫리자 코 호흡은 코 뼈가 부러지는 연습경기 하늘처럼 뻥 뚫린 기분이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코뼈가 부러지고 수술의 위력을 알게 된 나는 더 이상 헤더를 할 수 없게 된다. 머리 쪽으로 공이 날아오면 피하게 되었다. 축구선수라면 헤더를 하지 않을 수는 없기도 했지만, 내가 장점으로 가져야 할 기술 중 하나였다. 그 후 헤더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 훈련 시간 때 헤더 연습만 했었다. 사람은 의지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는 코를 다치기 전보다 헤더를 더 잘하게 되었다. 전화위복이 되어서 장점을 더 극대화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헤더 공포증은 커녕 고공 폭격기로 날리게 된다. 압도적인 피지컬에 연습으로 만들어진 헤더 기술은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자신감도 높아지면서 퍼포먼스 자체가 상승하게 된다. 이제 핑크빛 미래가 펼쳐지나 하려는 찰나에 다시 한번 미래의 그림에 물감을 쏟아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연습 경기 중 또 코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아니, 으스러지게 되었다. 다이빙 헤더를 시도하는데 상대 수비수는 발로 클리어하려고 했다. 그때 상대 선수 축구화 바닥과 내 얼굴은 정면 추돌하게 된다.
팡!
(그 순간 코 수술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처지나간다.)
처음에는 고통을 참아보려고 했다. 1초, 2초, 3초 으아아아아아악!!!!!!!!!!!!!!!!! 나는 얼굴을 움켜잡고 운동장 바닥에서 뒹굴게 된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고통의 정도가 가라앉아서 얼굴을 확인했다. 코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에 멍이 들고 상처가 생겼다. 하마터면 눈도 크게 다칠뻔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0.5cm 차이로 눈은 무사했다. 나는 바로 연습경기를 보러 온 학부모님 차를 타고 종합병원에 갔다. 역시나 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나는 겁에 질리게 된다. 코 수술이 얼마나 아픈지, 수술 후에도 얼마나 곤욕스러운지, 거즈를 뺄 때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으니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헤더 후유증은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겁에 질렸던 나는 어머니께 진짜 수술하고 싶지 않다고 울면서 때를 썼다. 어머니께서는 축구 관두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축구선수의 길을 가려면 견뎌내야 할 관문이라 생각했다.
처음 수술했던 병원과 같은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처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원래 다른 뼈와 다르게 코는 한 번 부러지면 더 잘 부러진다고 한다. 내 코는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전신마취를 한 후 대수술에 돌입하게 된다. 똑같은 수술대에 누웠다. 잔뜩 긴장했는데 수면제를 주입하자 어느새 몽롱하더니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뜨자 병실 천장이 보였다. 두 콧구멍은 막혀있었고 입으로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두통과 함께 속이 좋지 않았다. 진동제를 맞아도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고통은 이틀째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한 번 더 코 수술하면 축구 안 할게요."
그 후 첫 수술과 같은 패턴의 3주를 보냈다. 그러나 처음과 다르게 헤더 후유증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나의 장점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좋은 피지컬에도 불구하고 헤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이미지는 대학교까지 이어졌다. (헤더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장점으로 불리기에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프로 무대에 진입하자 나를 대표하는 장점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루 능력을 갖춘 선수보다 이것 하나만큼은 최고라는 장점을 가진 선수가 프로에서는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피지컬을 활용한 헤더를 위해 피나는 연습에 들어간다. 두 번째 코 수술 후 10년 만에 장점을 되찾게 된다. 헤더라는 장점은 나의 선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무기가 되어주고 있다.
후유증을 극복한다는 것은 강한 정신이 바탕되어야 한다. 다시 부러져도 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두 번째 수술 이후 다시는 코수술을 하지 않고 싶었고, 그 마음은 적극성을 떨어트리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 무대에 들어가면서 생존을 위한 결단이 필요했고 내 안의 겁쟁이를 몰아내고 코뿔소를 불러들였다. 코뿔소 정신과 의식적인 연습은 내게 장점을 선사하게 된다.
역시 사람이 변화를 바란다면 생각의 전환이 가장 먼저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의 전환은 환경이 만들어준다. 생존이라는 환경만큼 생각의 전환을 높이는 것은 없다. 나는 올해도 코뿔소를 불러들이려 한다. 내가 뛰는 무대에서 헤더 하나만큼은 인정받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필맨 코뿔소는 오늘도 박는다.
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