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골의 사나이 (Feat. 안정환)
나는 프로 경력 8년 차 축구선수다. 누군가 나에게 축구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생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너무 진부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다른데 나만의 인생을 표현할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다보니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다. 그게 바로 이 글의 제목에 있다.
"골든골의 사나이"
골든골을 많이 넣었냐고? 아니다. 지금껏 실제 경기에서 골든골을 넣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일단 골든골 제도가 폐지 된지 18년이 지났다. 18년 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골든골은 내가 축구를 시작하자마자 폐지된 제도이니 한 번도 넣어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왜 '골든골의 사나이'냐는 물음표가 떠오를것이다. 지금부터 그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보도록 설명하겠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 '한국 vs 이탈리아' 경기가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먼저 실점을 했고 0대 1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후반 43분 설기현 선수의 극적인 동점골로 승부는 연장전으로 미뤄졌다. 그리고 연장 후반 종료 4분 전에 이영표 선수의 크로스를 안정환 선수가 헤더로 연결해서 골망을 갈랐다. 당시의 나는 동네에 있는 쌍암 공원에서 길거리 응원을 하고 있었다. 골이 들어가자마자 그곳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누구는 울었고, 모르는 사람끼리 껴안고, 하이파이브를 쳐가면서 다함께 목소리 높여 외쳤다.
대~한민국! 짝짝! 짝짝! 짝!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골든골의 짜릿함과 그 과정을 익히 잘 알것이다. 패배가 짙어지는 순간 동점골로 원점을 만들고,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역전골이라니! 골든골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 순간을 오버랩해준다.
나의 축구 인생은 골든골 사나이 안정환 선수와 비슷하다. 우리가 지금은 안정환 선수의 역전골만 기억하고 있다. 만약에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국민 역적이 될 뻔했다. 그 이유는 전반전에 페널트킥을 놓쳤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골든골의 주인공이 안정환 선수였고, 다행히도 국민들은 반지 세레머니 후 카메라 기자들 앞에서 누워 눈물을 흘리는 안정환 선수만 기억하고 있다.
나의 축구 인생도 그랬다. 프로 1년 차에는 18명 엔트리는 커녕 1군에서 훈련조차 하지 못했고, 프로 2년 차에는 우승 확정 후 1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경기를 뛰지 못한 선수에게 돌아오는 답은 방출이다. 팀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여기저기 테스트를 봤지만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구사일생으로 기존 팀에서 기회를 줬고 그 해에 1부리그 24경기를 뛰면서 축구인생을 이어나갔다. 1부리그에서 첫 경기 때 종료 휘슬이 울리자 그 동안 고생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느새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을 넣을 때처럼 내 눈에도 물방울이 맺혔다.
축구선수에게 군대는 치명적이다. 축구선수들은 보편적으로 30대 중반이 오기전에 은퇴를 한다. 즉 20대부터 30대 초중반까지 축구선수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수술 이력없이 건강한 축구선수가 군대를 갈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주상무에 지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산 무궁화에 지원하는 것이다. (지금은 아산무궁화가 시민구단으로 전환되어 상주상무 밖에 없다.) 만약 신체검사 때 4급을 받았다면 공익근무를 병행하면서 K3팀에서 축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별명이 터미네이터 였던 나는 코 수술 두 번을 제외하고는 크게 다친적이 없다. 부상 없이 꾸준히 하는 것은 행운이었으나 군대라는 벽이 점점 다가올 때에는 너무 건강한 몸을 탓도 하게 되었다. 나는 축구 경력을 이어가면서 군대를 갈 방법이 상주 상무와 아산 무궁화 밖에 없었다.
나는 프로입단 후 매년 상주상무와 아산무궁화를 지원했다.(상무 3회, 무궁화 5회) 지원은 만 27세 이하만 가능했다. 10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던가. 나는 8번재 시도인 지원할 수 있는 마지막 만 27세 때 아산 무궁화에 합격을 하게 된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너무 기쁜 나머지 외갓집 식구들을 불러서 파티까지 할 정도 였다.
아산 무궁화에서 전역 날짜는 2019년 1월 31일이었다. 아산 무궁화 동료들은 각 팀에서 실력자들만 모인 선수들이다. 그들은 실력과 태도 그리고 인성까지 갖춘 프로페셔널한 선수들이다. 군복무 기간동안 그들에게 많이 배웠다. 배운것은 좋았으나 경기를 많이 뛰지 못한것은 좋지 않았다. 1년 9개월 동안 뛴 리그 경기 수는 5경기다였고, 전역할 때 나이는 만 30세였다. 적은 경기 출장 수와 서른이라는 나이는 팀을 구하는데 큰 난관이 되었다. 동남아 리그에서 오퍼가 왔었으나 몸상태를 확인 후 계약을 하고 싶다고 했다. 군인 신분으로 해외를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패스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는 결혼 한지 한달 채 되지 않았기에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준 팀이 목포시청축구단이다. 전역하기 1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전화가 왔고 전역하고 다음날인 2월 1일에 목포로 내려갔다.
목포에서 리그 28경기 중 21경기를 뛰면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팀 성적은 중하위권이었지만 개인적인 퍼포먼스는 기대이상이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감독님이 바뀌셨고, 그여파로 기존 선수 6명을 남기고 모두가 FA선수(자유계약)가 되었다. 나도 모두 중 한명이었다.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연락 온 시기는 12월 둘째 주 였는데, 그 때는 대부분 팀들이 선수 수급을 어느정도 마친 상태였다. 작년은 결혼이었지만 이번에는 애가 태어나기 일보직전이었다.(12월 26일 득남) 감사하게도 12월 말쯤 천안시청축구단에서 연락이왔고 현재 CCFC 엠블럼이 박힌 트레이닝 복을 입고 동계훈련을 하고 있다.
올해로 프로 경력이 8년 차다. 매년 나이가 들어갈 수록 계약에 대한 부담이 크다. 거기에다 안정환 선수가 페널트킥을 놓쳤던 것처럼 경쟁에 밀려서 경기를 뛰지 못해 가치가 떨어진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것을 만회하기위해 죽기아님 살기로 뛰어다녔다. 기회는 왔다. 연장전에 말이다. 피가 말리는 순간이었다. 안정환 선수는 골든골을 넣은 후에 카메라 기자들이 많은 코너에 누워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것 같다. 얼마나 부담이 되었겠는가. 만약 경기를 이겼어도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넣었다면?! 다행히 마지막에 찬스가 왔고 그 찬스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나의 축구 인생도 비슷한 맥락을 따랐다. 그랬으니 지금도 축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골든골을 넣고 싶지 않다. 정규시간 안에 골을 넣어서 승리하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력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과거 연장전까지 갔던 내 축구 인생은 실력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연장전 골든골을 넣은 것도 운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 까지도. 만약 연장전이 끝날 때까지 골을 넣지 못했다면 나는 이미 축구화를 벗었을 것이다.
지금 껏 나에게 축구는 골든골이었다. 오늘부로 바꾸고싶다.
나에게 축구는 결승골이다.
정규 시간안에 결승골을 넣어서 승리하는 내가 되도록 하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전제다. 수도승의 삶을 살아서 올해에는 멋지게 결승골로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