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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대한필맨 Feb 22. 2020

'프로' 타이틀을 만들어 준 '사람들'(Fan)

프로 축구의 핵심은 '팬'입니다.

나의 모교는 서울 동북고등학교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동북고등학교는 손흥민 선수가 다녔던 학교다. 공교롭게도 내가 3학년 때 손흥민 선수가 1학년이었다. 손흥민 선수가 독일로 유학을 가기 전 6개월 정도 함께 합숙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가 잘 잘 챙겨줬는데... 기억하니? 흥민아? 레버쿠젠 갈 때까지는 연락이 됐는데....


아무튼 우리가 동북고등학교에 모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모교가 FC서울의 유소년 팀이었기 때문이다. FC서울의 U-18세 팀이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잘한다는 선수들이 모이게 되었고 그중 한 명이 손흥민 선수였다. 프로팀의 유소년 선수가 되면 졸업 후에 바로 프로에 진출하거나 우선지명을 받고 대학을 갈 수가 있었다. 나는 후자를 선택해서 대학을 먼저 갔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고학년이 되면서 FC서울 2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2군 리그인 R리그를 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고3 후반기에는 대부분 2군에서 훈련했던 기억이 있다.


FC서울 하면 팬이 많은 구단으로 유명하다. 수도에 있는 팀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팬의 유입이 컸다. 대학교 때도 구단의 요청으로 R리그를 참여했었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축구팬들과의 접촉이 많아지도록 했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정식 프로 계약을 하지 않은 선수였지만 FC서울 유니폼을 입고 뛴다는 자체로 목청껏 내 이름을 외치고 응원해주는 팬들을 볼 때면 참 감사했다. 팬들에 대한 나의 첫 이미지는 감사한 사람들이었다. 

대학 시절 R리그를 뛰기 위해 몸을 푸는 ‘나’


R리그 때부터 시작하면 13년 동안 축구팬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축구를 해왔다. 처음에는 감사함을 갖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마음도 무뎌졌다. 아마도 프로 진출 후 경기를 뛰지 못하고 있던 스스로의 모습에 위축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다. 그러던 중에 팬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파악하게 되는 계기 생겼다. 2018년 8월쯤이었다. 내가 한참 독서에 빠져있을 때다. 독서를 통해 책과 축구를 연결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던 찰나에 아내가 대전 대흥동에 위치한 <도시여행자>라는 북카페를 추천해줬다. 이유는 대전시티즌 서포터스 회장 출신이 운영하는 북카페이기 때문이었다.


'아르키메데스'도 이런 기분으로 유레카를 외쳤을까. 나는 아내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다음 외출 때(당시 의경 출신으로 아산 무궁화 FC에서 군복 중이었다) <도시여행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사장님은 나를 알아보셨다.


"김상필 선수! 여기는 웬일이세요?"



2년 전에 대전시티즌 선수였던 나를 기억하고 단박에 알아보시는 게 신기했다. 나를 알아보는 자체가 '찐' 서포터스라는 것을 증명했다. 감사하게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무료로 제공을 받았다. 나는 <요즘 것들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구입하면서 그 감사함을 전했다. 우리는 1시간 30분가량 대화를 나눴다. 아니 들었다. 내가 <도시여행자>를 온 목적은 책과 축구를 가장 잘 연결하는 분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장님(이하 라가찌_이탈리어로 소년이라는 의미.)께 목적을 전달하면서 자주 뵙고 싶다고 표현을 했다. 라가찌는 반갑게 맞이해주면서 자신이 어떻게 덕질을 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셨다.


라가찌는 인생의 세팅이 대전시티즌에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덕질이 서른이 넘어서도 ing라니... 진짜 성덕이었다. 역시 나를 단박에 알아볼만한 분이셨다. 라가찌는 대전시티즌을 넘어서 축구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도시여행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축구여행을 많이 다니셨다. 일본과 유럽 축구리그에서 직관을 한 적이 많았다. 경기만 보는 게 아니라 구단이 어떻게 팬들과 소통하는지도 유심히 관찰도 했다. (아마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게 바라는 모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본다.)


<도시여행자>를 처음 찾아간 날, 나와 라가찌


라가찌에게 전해 들은 타국의 구단들이 팬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반포레 고흐'라는J리그팀이 인상적으로 기억이 남는다. 인구가 20만 밖에 되지 않는 소도시에서 평균 관중 12000명을 확보하게 된 스토리는 감동을 넘어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 이유는 K-리그 1의 대부분 팀들도 만 명 관중을 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평균 관중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칠 듯이 시도한 지역밀착 활동에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례를 들으면서 한국 축구는 왜 팬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지 물음표가 떠오르게 되었다. 아마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민구단이 많은 K-리그 특성상 알게 모르게 정치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축구 산업이라는 큰 바운더리 안에서 팀을 만들기보다는 눈 앞의 성적을 잡기 위한 선택의 반복이 팬을 등한시하는 결과라 초래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대한축구협회를 중심으로 많은 구단들이 협력해서 팬들을 위한 제도 또는 활동을 폭넓게 가져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선수인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과거 일부 선수들은 경기 종료 후 선수들과 사진을 찍고 싶고, 사인 받고 싶은 팬들을 신경 쓰지 않고 버스에 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경기에서 졌거나, 선수 개인의 플레이가 좋지 않았을 때다. 한 때 스포츠 뉴스에 나올 정도로 이슈가 되었는데, 외국의 스포츠 스타들과 비교가 되면서 한국 스포츠 선수들의 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게 아니냐는 비아냥도 듣게 되었다.




엘리뇨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페르난도 토레스'의 팬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비행기에서 토레스를 발견한 리버풀 팬인 부자(父子)가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던 토레스가 깨자 포스터에 사인을 부탁했다. 사진도 부탁했지만 비행 중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토레스는 공항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자고 한다. 공항에 도착했지만 토레스는 체크인을 하지 않아서 부자와는 다른 경로로 나가게 되었다. 부자는 설상가상으로 짐을 찾는데 15분 이상이 걸렸다. 토레스와 사진을 찍을 마음에 부풀었던 마음은 접어야 하는 상황에 놓은 것이다. 아쉬움을 달래고 부자는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토레스가 전화를 하면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스페인 국가대표 버스도 함께 말이다. 그 버스 안에는 세계적인 선수들이 타 있었다. 부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스페인 국가대표 전원이 기다려준 것이다. 물론 토레스의 팬에 대한 태도가 가장 컸을 것이다. 부자는 토레스와 인증 사진을 찍었고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게 된다.

토레스와 아들 팬

훈훈하다. 너무 훈훈하다 못해 심장이 녹아내린다. 한국 문화에서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우리는 이 일화를 단순히 훈훈함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 팬과의 약속을 지켜낸 스페인 국가대표 팀의 태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미 한국 축구 산업은 축구팬들에게 많은 신뢰를 잃었다. 승부조작, 불법 도박, 음주운전 등 다양한 사건 사고를 통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축구장을 향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신뢰란 쌓기는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팬들을 위한 것이 무엇일지 대한민국 축구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심사숙고해야 한다. 선수들이 가져야 할 가장 첫 번째 태도는 철저한 자기 관리다. 프로 축구선수는 공인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퍼포먼스를 통해 재밌는 축구를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다. 늘 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작년에 목포시청 축구단 소속일 때 팬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선수단 마케팅 팀을 만들어서 운영했다. 우리가 목표했던 서포터스석 100명은 이루지 못했지만 기존의 서포터스 분들에게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어준 것 같아서 뿌듯했다. 아마도 그분들은 앞으로도 목포시청 축구단을 변함없이 응원해 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랬을 테지만, 응원을 응원하는데 도움된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크나큰 자부심을 느낀다.


왼쪽 박태하 작가님과 오른쪽 김혼비 작가(두 사람은 부부다) 출처 : 서울신문


<괜찮고, 괜찮을 나의 K-리그>의 저자 박태하 작가님은 성남 FC의 열렬한 팬이다. 책에서도 그의 덕질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자세히 나온다. 그 외에도 타 팀의 진성 축구팬들을 인터뷰해서 축구팬들의 마음과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감사한 마음이 솟구쳤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K-리그를 열렬히 사랑해주는 팬들의 존재와 그 팬들을 알게 해 준 박태하 작가님께 이 글을 빌려 감사함을 전한다. K-리그는 축구팬이 없다면 아마추어 리그와 다를 게 없다. 팬, 선수, 구단은 삼위일체의 의미와 같다. 어느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안타깝게도 긴 시간 동안 '팬'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많은 팀들이 지역밀착 활동을 늘리고 있는 추세고, 팬들도 그에 부흥하여 경기장에 발길이 많아지는 듯하다.




올해는 천안시 축구단 'CCFC'의 유니폼을 입고 뛴다. 우리 팀은 홈경기 때 타 내셔널리그 팀보다 많은 관중수를 자랑한다. 작년에 가장 부러웠었던 팀이 서포터스가 많았던 'CCFC'였다. 구단에서는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올해는 선수로서 내가 해야 할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데 무게를 둬야겠다. 그리고 경기장에 찾아와 주신 팬들이 계시다면 한 분, 한 분 친절하게 대응해 드리겠다고 약속한다.

출처 bubusajindan.foodball. instagram

2020년 3월 7일 2시에 천안 종합운동장에서 춘천시 민구 단과 개막전이 열린다. 많은 분들이 이 날 오셔서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CCFC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나를 볼 수 있고, 경기 후에 친절한 팬 서비스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라가찌와 만남은 팬에 대한 나의 인식을 180도 바뀌게 해 줬고, 라가찌가 선물로 준 <괜찮고 괜찮을 나의 K-리그>는 축구팬들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해 줬다. 팬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고 그라운드 안팎에서 보답하는 선수가 되자.


감사합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축구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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