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가서야 알게 된 '맛있는 김'의 맛
김 이야기를 하려면 아주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 섬마을에 사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겨울이면 '김농사'를 지으셨다. 한겨울에 추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진행되는 김농사의 모습들을 이제 와서 떠올려보면 너무너무 고됬을 것 같지만,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몇 해를 할아버지 댁에서 보내면서, 몇 번의 김농사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는 그게 너무 신기했었는지, 장면 장면들이 지금도 사진처럼 기억이 난다. 커다란 검은 통에 바다에서 따온 김을 넣고 휘휘 젓던 삼촌들의 모습, 물속에 있는 그 김들을 한 국자 떠서 네모난 틀에 부어 넣으면, 김발 위에 네모 반듯한 김이 한 장이 만들어지던 모습, 건조대에 끼워진 수많은 김발들이 동네 담벼락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던 모습... 이런 장면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따뜻한 방에 모여 앉아 잘 말려진 김을 떼어서 100장씩 묶는 과정인데, 이 작업에는 어린아이였던 나도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을 잘 떼어내서 한 곳에 모으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말린 김을 떼어내다가 김이 찢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게 문제였다. 찢어진 김은 상품이 될 수 없으니, 그대로 입으로 들어가거나, 따로 모아 우리 가족들이 먹어야 했다. 그렇게 찢어진 김을 주워 먹고, 그 김으로 김국도 끓여 먹고, 김무침도 해 먹고, 한 장씩 구워 간장에 찍어먹고 하며, 김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너무 많이 먹어서일까?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오히려 구운 김을 잘 안 먹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친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도시락 반찬 중 하나가 김이었다. 다들 좋아했고, 도시락 가방에 김 한 봉지씩 넣어 오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도통 그 '도시락 김'이 맛이 없었다. 종이 같기만 하고, 짠맛 외에는 별 맛이 없는 그 도시락 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오는 일도 드물었고, 반찬으로 가져왔다고 해도 다른 친구들이 다 먹었지,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초중고 학창 시절을 거쳐, 자취를 하던 대학 시절에도 나는 김을 잘 먹지 않았는데, 이런 내 까다로운 식성은 군대에 가면서 모두 달라졌다.
'80원'
군대에서 처음으로 배식받은 얇은 김봉지 위에는 작은 글씨로 '원가 8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적나라한 원가 표시와 거기에 어울리는 얇은 두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표, 적어도 나에겐 식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반찬이었다. 그래도 군대 와서 훈련받다가 먹은 음식들은 다 꿀맛이었으니까, 속는 셈 치고 밥 한 숟가락에 김을 한 장 싸서 입에 넣었는데, 내 생각과 달리 너무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흰 밥에 김만 있어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 밥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반찬들과 마찬가지로 남김없이 김을 먹어치운 뒤로 나의 '김 편식'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훈련병 시절 자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이상식욕이 가득했던 때였지만, 어쨌든 나는 다시 김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신병 훈련을 마치고 첫 번째 100일 휴가를 나가게 되었는데, 나는 부모님 댁에 가기 전에 당시 부대에서 가까이 살고 계시던 할머니 댁을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첫 휴가를 나온 손주를 보고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하면서 연신 눈물을 흘리셨고,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있는 한 상을 차려 주셨는데, 그 밥상의 주인공은 단연 구운 김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반찬이었지만, 이미 군대에서 여러 차례 맛있게 먹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직접 김농사를 지어보셨던 할머니는 당연히 시장에서 김을 고르는 눈도 남다르셨는데, 시골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재래김을 구해서 참기름을 발라 한 장 한 장 구워주신 김은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맛있었다. '뭐지? 내가 군대에서 먹은 건 김이 아닌가?', '김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이런 생각을 하며, 태어나서 처음 김을 먹어보는 사람처럼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나는 김을 싫어했던 게 아니라, 어린 시절 '너무 맛있는 김'을 원 없이 먹고 자라서, 다른 김들은 도통 맛이 없었던 것이었다. 적어도 김 맛에 있어서는 입이 한없이 고급이라, 당시 마트나 슈퍼에서 살 수 있었던 저렴한 '공장 김'에서는 맛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사실을 스무 살이 넘어 할머니가 구워주신 김을 먹으며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질리도록 김을 먹어서 김을 싫어하게 된 게 아니라, 어린 시절 맛있는 김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다른 김들이 성에 차지 않았던 거구나'라는 놀라움과 함께, 할머니가 차려주신 100일 휴가 첫날의 식사는 영원히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이제는 맛있는 김을 구워주시던 할머니도 안 계시고, 나로서는 김의 모양과 냄새만 가지고 맛있는 김을 골라낼 능력도 없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마트에서도 잘 만들어진 맛있는 김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우리 집에는 김에 있어 나보다 더 까다로운 기준을 갖춘 아내가 있다 보니, 우리 집에는 항상 맛있는 김이 반찬으로 준비되어 있다. '김도 없이 다른 나라 부모들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김을 잘 먹는 아이를 볼 때면, 한사코 김을 거부하며 심한 편식으로 부모님 속을 어지간히 썩혔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이 생각난다. 저렇게 잘 먹는 것만 봐도 이렇게나 기분 좋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