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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re May 13. 2024

처음 끓여본 미역국

생일상으로 처음 끓여 본 미역국의 기억

 내 또래의 다른 많은 남자애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대학을 갈 때까지 라면을 끓여 본 거 외에 요리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을 가서도 하숙집과 고시원을 전전하던 때에는 굳이 무언가를 해먹을 필요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자취를 시작하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을 테니, 아마도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집에서 요리라는 걸 하기 시작했던 거 같다.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나는 먹는 거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하루종일 뭘 안 먹고 있어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대충 먹을만한 음식이면 아무거나 먹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시작하면서도, 일단 밥을 할 줄 알았고, 적당한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서 지나치게 많이 사다 놓은 밑반찬이 몇 종 있었으니, 국만 어떻게 끓일 수 있으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국'이었다. 나에게 첫 요리란 '먹을 수 있는 국을 끓이는 일'이었다. 일단, '김치+무언가'의 방식으로 무한대로 확장이 가능한 각종 김치찌개를 마스터하고 나서, 여기저기서 찾아본 레시피를 바탕으로 다양한 국을 끓여내었다. 미역국, 콩나물국, 황탯국, 만둣국, 어묵국, 각종 된장국 등등을 만들다 보니 내가 보기에도 내 밥상이 그럴듯해지기 시작했다. 이로서 나는 스스로를 '요리할 줄 아는 남자'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맛을 내는 문제는 전혀 다른 이슈였다.


 그렇게 '요리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 대전에 있는 부모님 댁에 내려갈 일이 있었다. 정확히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좀 있으면 어머니 생신이 다가오던 때였고, 아마도 그 거 때문에 내려가지 않았을까 싶다. 언제나 생활비가 빠듯했던 고학생 입장에서 당연히 뭔가 그럴듯한 선물을 준비할 순 없었고, 대신 이제 요리할 수 있는 남자가 되었으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께 미역국을 끓여드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따로 육수를 내는 방법도 몰랐지만, 내가 알기론 미역국이라는 게 원래가 그리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음식이 아니었다. '무조건 미역을 오래 볶을수록 맛있어진다'는 신념 하나로 어머니가 나가 계신 동안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재료를 찾는 일이었다. 집을 떠나 산지 오래된 때라,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김이 새니까, 내가 알아서 대충 찬장의 여기저기를 뒤져 미역을 찾아냈고, 냉장고에서 고기도 찾았다. 그리고 미역을 불려 놓고, 고기와 다진 마늘을 볶으며 여유 있게 요리를 시작했다. 다 불려 놓고 보니 미역이 좀 특이했다. 내가 서울에서 먹던 거와 달리 굵직하고 매끈한 게 뭔가 더 좋아 보였다. '어디에서 선물 받으신 좋은 미역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걸로 끓인 미역국이면 맛이 없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미역을 볶고, 물을 넣고, 간을 하고 해서 간단하게 미역국을 끓여내었다. 미역의 모양이 좀 특이한 게 신경 쓰였지만, 그런대로 미역국 같았다. 그래도 맛은 봐야겠다 싶어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는데, 이건 내가 아는 맛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내가 끓여낸 건 어디 족보에도 없는 '다시마국'이었다. 미역이라고 찾아낸 건 말린 다시마였고, 그런 다시마를 잔뜩 넣고 국을 끓였던 것이다. '미역'과 '다시마'도 구분하지 못해서 다시마국을 끓였다는 게, '요리할 줄 아는 남자' 입장에서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당연히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내가 만들어 낸 국을 보며 박장대소하셨고, 그 정성이 갸륵하기에 너무 기분이 좋으시다는 말씀만 하셨지, 맛있다는 말도, 심지어 제대로 드시지도 않으셨다. 그래도 생전 엄마를 위해 요리라는 걸 한 적이 없던 아들이 미역국을 끓여주었다고, 어머니는 무척 기분 좋아하셨고, 그 뒤로 한 동안,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랑 반, 놀림 반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다니셔서 무척 당황스러웠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생일에는 케이크보다는 미역국이라는 아내의 신념에 따라, 누구 생일이면 꼭 미역국을 먹는다. 그리고 파주에 아주 맛있는 미역국 단골집도 생겼다. 다시마국이나 끓이던 예전에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진한 국물의 미역국을 내어오는 그 집은, 상호부터가 <엄마 미역>이다. 곁들이는 국의 한 종류로 나오는 미역국이 아니라 당당히 메인의 자리를 차지한 음식으로서의 미역국. 몇 해 전 청담동을 시작으로 고급스러운 미역국 집들이 많이 생겨서 여러 곳을 가봤지만, 그중에서도 내 입맛에는 이 집이 제일이었다. '미역국에 진심이면, 이게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을 갖게 해 준 귀한 집. 뭐든 진심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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