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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25. 2017

M선생님께



이제 도시에 사는 우리들, 

아니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대문이 없어졌군요. 

야트막한 담이 단정하고 고운 옷이라면 

대문은 그 옷에 마지막으로 달아놓은 단추 같다고나 할까요,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는 세상의 문 인데 말이지요.  

대문이 없어져서 들어오고 나갈 일이 없는 기이한 세상에 

우리가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들어가면서 바깥 세상의 자신을 뒤 돌아보고 

나오면서 집에서의 자신을 뒤 돌아 보는 그런 틈이 없는 

맹랑한 시간들 말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에는 대나무로 만든 대문도 있었어요. 

굵은 대나무를 통째로 엮어 만든 대문도 있었지만 

대가 가늘어선지 대나무 잎까지 넣어서 엮은 대문도 있었지요. 

자그마한 대나무 잎들이 새끼에 꽁꽁 묶인 채로 대문이 되어 있으면 

어린 내 눈에도 그 이파리들이 달리 보이곤 했었어요. 

처음엔 초록잎 이다가 차츰 누우렇게 바래가곤 했지요.  

그 초록 대나무 잎들이 묶여있는 집은 사실 담이 전부 대나무였어요. 

이제야 생각해 보니 그 동네는 정말 집집마다 대나무가 없는 집이 별로 없었던 것 같군요. 

옆이나 뒤나 하다못해 변소 뒤쪽으로라도 대나무들이 자라나곤 했으니....... 

다른 이유가 혹 있을지도 모르지만 워낙 대나무가 자생력이 강하고 벌레도 없을뿐더러 

겨울에도 푸르르니 추운 겨울에도 푸르르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 탓이려니 생각 해봅니다. 

(사실 겨울이 윤기나는 알밤처럼 엉글어가고 있는 이무렵이면

정말 초록이 고파서 허기가 지는것 같기도 합니다) 

깍아 지른 듯한 아파트나 거대한 건물 곁에 

대나무를 심는 이유는 조금  다르겠지요. 

조경업자들 말로는 조경이 어울려서라고 하나 

키는 크면서도 다른 나무들과는 비교 안 될 정도의 엷은 부피 때문이 아닌가 싶더군요. 

건물이 주는 날카로운 위화감을 벽지 바르듯 얇은 대나무가 상쇄할 수 있어서요,  

가느다란 대나무로 엮은 대문이 있는 집은 우리 집 골목 끄트머리께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그 초록 대문에  낮이었는데도 붉은 색 등이 달려 있었어요. 

검은 글씨 두 자가 쓰여 있는,  

물론 아직 어려서 그 등이 죽음을 표시한다는 것을 알리가 없었지요. 

그런데도 등불이, 

밝은 빛인데도 그 알 수 없는 음울한 빛의 정체가 내심 의심스러웠지요. 

낮에도 켜있고 해저물녘에도 켜있는 그 등의 빛깔.  

아마 어린 내가 맨 처음으로 의식한 죽음의 빛이 아니었을까?  

캄캄해진 뒤에 무서워서 밖엘 나가지 못했음에도 어두운 세상에 홀로 밝혀 있는 

그 등을 생각했던 시간들의 기억이 이렇게 선명한 것을 보니 말입니다.    

굳이 죽음의 여의사라고 불리웠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을 보지 않더라도 

사람의 인생이 숨이 멈춰짐과 동시에 소멸의 길을 걷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령 물질로 혹은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는 소멸한다 할지라도 

그 집을 마음대로 부리며  살았던 그 미묘한 존재 - 

평생 한 번도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은 - 

그러나 육체를 살아있게 했던 그 매우 정신적인 존재ㅡ 

와의 분리가 죽음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그렇다면 그 이별의식이 틀림없이 진행될 것이며  

그 순간을  산사람들은 돌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경건하고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코 쓸쓸하게......   

자신이 거했던 집을 벗어난 마음, 혼, 혹은 영혼은 아마 추워 할 것  같습니다.

이별의 쓰라림이 왜 없겠어요. 

특히 이즈음처럼 겨울이라면 말이지요. 

그래서 팔짱을 꼭 낄지도 모르겠어요. 

이제는 흙으로 되돌아갈 자신의 몸을 한참 들여다보며 나름대로의 이별의식을 고하겠지요. 

그리고 방문을  닫고 나서는 겁니다.

 마당이 있으면 좋겠지요. 

여기저기 가만히 기웃거려봅니다. 

익숙한 부엌이랑 텃밭, 

그리고 어느 순간은 다람쥐처럼 달려가는 어린 조카아이와 부딪힐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이는 전혀 의식을 못할거구요.  

그렇게 대문을 나서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등 하나 쓸쓸하게 밝혀 있는 대문. 

검은색 글자로 근조라고 서있는 등 앞에서 한참 서성이다가 

뒤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갈겁니다.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의 죽음을 알리는 조등이 길게 아주 오랜 동안 비쳐줍니다. 


며칠 전 우연히 강화도에서 백씨네 상가라는 표지판을 보았고 걷다가 

다시 근조라고 적혀있는 대문을 본적이 있지요. 

오래된 대문에 매달려 있는 겨울 빛 같은  근조 등을 보며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조등을 떠올렸어요.  

근데 

그러기 전 조등 앞에서 서성거리기 전. 

살아  있을 때 이런 사소한 것들을  하라더군요.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헤아렸던 호스피스 운동가이자 철학자인 

로즈선생께서 말이지요. 

*******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는가?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것은 언제였는가? 

아기의 머리를 만져 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는가?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한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지금 그들을 보러가라.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쉬운것에 대해 지금

놀래고 계신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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