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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25. 2017

아버지

아버지, 엄마 좀 보세요. 아무리 붙잡아도 기어이 차를 타고 마시네요. 
벌써 이렇게 어두워졌으니 보성 역에 내리시면 아주아주 깊은 밤일 텐데, 
캄캄한 길 홀로 걸어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시면 아버지 안 계신 빈집 밤길 보다 더 어둡고 적막할 텐데.....

가뭄에 나는 콩처럼 드문 서울 나들이 길에도 아버지 진지 때문에 선걸음 총총 옮기시던 엄마가 오늘 미경언니 딸 결혼식에 오셔서도 그냥 가시겠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외할머니 기다린다며 손자들도 보고 싶지 않냐며 엄마 팔을 끌었지요. 그래도 듣지 않으시 길래 그냥 불쑥 말이 나와 버렸어요. 
“엄마, 이젠 아버지 진지 차릴 일도 없으시잖아요.”


아버지. 아버지도 엄마의 그런 표정 보신 적 있으신가요? 쓸쓸하고 처연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한,
그 순간, 내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던지 그냥 또 눈물이 흘러버렸어요. 
하긴 요즈음 저도 혼자 있을 때마다 아버지 생각나고 마치 눈물은 아버지 그림자라도 되듯 뒤따르곤 하니......
고개 숙인 제게 엄마가 말씀하시더군요.
"진지 차릴 일이 없어서 가불라고 한다. 너희 집서 며칠 있다 가면 더 쓸쓸할 것 같어서...." 

사실 아버지 떠나시던 때도 엄마 별로 울지 않으셔서 언제나 씩씩하고 대범하신 대로 
아버지 떠나가시는 길도 의연하게 배웅하시는구나 생각했지요.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 놓으신 집으로 아버지 좌정하실 때도 엄마는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나무만 바라 보시 길래, 
아버지 연세도 있으시고, 아프셨으니, 그동안 마음 준비 잘하셨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예배도 파하고 하관식도 끝났지만 새로 지어진 아버지 집을 쉬 떠날 수 없어서 
우리 모두 서성거리는 동안 엄만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앞서서 산을 내려가셨어요.
허리가 다른 날보다 유별나게 꼿꼿해 보여서 오히려 안쓰러워 보이긴 했지만 말이에요. 

그즈음 이른 아침이면 하얀 이슬이 풀잎에 맺히곤 했지요.
아버지 떠나시던 날 하늘은 어쩌면 그렇게 구름 한 점 없이 파란지....

그날 밤 달이 그렇게 맑고 밝으려고 그랬나 봐요. 
아버지 빈자리를 의식하면서도 아버지 영정 사진에 대고 아버지 아버지, 속삭이듯 불러보기도 하면서 
그래도 살아있는 우리는 먹고 마시고 도란거리다가 모두들 일찍 잠이 들었어요. 
제가 막내니깐 엄마 곁에 누워서요.
자다가 무엇인가가 허전해서 잠이 깨었는데 엄마가 곁에 계시지 않았어요. 
화장실엘 가셨나 한참 기다려도 돌아오시질 않아 가만히 일어났지요.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얼마나 환했는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어요. 
마당으로 나가 보았지만 엄만 계시지 않았고 
소살 거리는 달빛만 아버지가 키우시던 뜨락의 나무들을 어루만지고 있더군요.

특별히 귀하게 여기시던 오래 묵은 동백나무를 바라보면서 
이젠 다시는 너희들도 아버지 손길을 못 느끼겠구나 싶으니 목이 메면서 눈물이 흐르는데........... 

그때 무슨 소린가가 귀에 자그마하게 들려왔어요. 엄만가 싶어 소리를 따라 가보니 아래층 창고였어요. 
억눌린 울음 엄마가 생전에 아버지가 출입하실 때마다 타고 다니셨던 오토바이를 어루만지며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울고 계셨어요.
아버지. 그제야 엄마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을, 일흔아홉 살의 엄마가 과부가 되었다는 것을, 
부모보다 더 오랜동안, 자식보다 길고 긴 세월을 함께 지내 온, 마치 엄마의 몸 같은, 살 같은, 
생명 같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을...... 
아버지 잃은 슬픔은 엄마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아버지, 아버지는 모르시지요? 아버지가 먼 길 떠나실 때 
엄마의 '재미'를 아버지 호주머니에 넣고 가버리신 것 말이에요. 

며칠 전 언니가 엄마에게 다니러 갔대요. 엄마가 언니와 장기 두는 것을 얼마나 즐기시는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른 저녁 뒤에 장기판을 펼쳤대요. 겨우 두 판을 놓았는데. 엄마가 그만두자고 하시더래요. 
아무리 허리가 아프셔도 장기 하면 벌떡 일어나 

몇 판이고 상대방이 그만두자고 할 때까지 즐기시던 그 장기를요. 
그러시더니 엄마가 그러시더래요.
“야아, 너희 아버지가 내 재미를 가져가 불었는 갑서야, 

장기도 재미가 없고 세상에 아무것도 재미있는 것이 없서야..” 

아버지. 마지막 숨을 내어 쉬실 때서야,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해요, 사랑해요 라고 
고백한 이 막내딸의 수줍은 고백도 사랑이지만 
아버지 안 계신 세상 속에서 아무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엄마의 사랑 고백은 
이 세상 어느 시인도 흉내 내지 못할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사랑고백이 아닐는지요. 

아버지, 엄마를 실은 차가 떠나가네요. 엄만 그제야 아주 잠깐 나를 바라보시네요. 
벌건 눈 보면 막내딸 가슴 아플까 봐, 마지막엔 그래도 보고 싶어서 말이에요. 

쓸쓸함도 사랑이겠지요.
소란스러운 딸네 집에서 아버지를 잊고 있는 것보다 
쓸쓸함 속에서 아버지를 느끼고 싶은, 
어둡고 적막하더라도 아버지 계셨던 빈집의 쓸쓸함이 더 견디기가 쉬운 그리움이요.

아버지 가신 곳도 혹 엄마가 없으셔서 쓸쓸하신가요?
엄마가 떠나버려선지  깊어가는 가을밤 막내딸도 참 쓸쓸하네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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