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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13. 2019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한병철의 심리 정치


어젯밤 하늘은 더할 수 없이 짙은 블루였다.

아마도 비 온 뒷날 가시거리 좋은 낮의 여파였을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이라 하여 색 없겠는가, 그저 어두운 색 하나겠는가.

말 그대로 어두운 색은 수많은 밝은 색처럼 많을 것이다. 아마도.

광화문 시네큐브 쪽에는 은행나무가 많았고 우리 동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길 가로수는 주로 느티나무였다. 어찌 되었던 그들은 아기 손 같은 어린 순을 몸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가로등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 위에서 혹은 아래여서.... 당연히 나뭇잎들은 하나같이 다르다.

그러니까 나무들... 그 새순들은 정말 형형색색이었다. 

한 나무에서 솟아난 수많은 다름들이 어둡고 강한 블루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마다 절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가느다란 검은 가지가 보이지 않는 어느 나무는 

나뭇잎들이 마치 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현키 어려운 색의 향연이 거기 펼쳐지고 모아지고 흩어지며 혹은 혼자서.... 빚어내는 수많은 형체들.  

나는 가끔 혼자 슬며시 오만해질 때가 있다. 어젯밤 나무를 바라보며 돌아오던 길에서 그랬다. 

세상에 지금 이 순간 누가 이 밤에 지금 나처럼 나무를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겠는가,

이 밤 이 시간 이 나무 아래는 지금 나 혼자 뿐인데..... 그러니 참 얼마나 기발하면서도 초라한 오만인가 ㅎ 

사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서 저마다의 독특한 경험을 하며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림으로 친다면 어느 누구도 그려내지 않는 오직 나만의 그림, 그러니 다가오는 시간들을 지금을 과거를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싶으면서도 시간은 사라진 듯하오. 세월만 남은듯하오. 

어제 먼 캐나다에서 온 카톡에 답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한병철의 책을 세 권째 읽었다.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그리고 이 책  <심리 정치>

책 뒤에는 문지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한병철과의 대담록이 붙어 있었다.  

그는 오늘날 언어가 없다! 고 했다. 침묵과 고요 속에는 언어가 있지만 엄청난 소통의 소음과 말없음은 언어가 없다는 것. 앎은 없고 정보만 있는 사회.  앎은 전혀 다른 시간 구조ㅡ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데 앎은 경험에 기반을 두지만 정보는 현재 지금 뿐이라는 것, 

그가 표현한 성찰 없는 구글학! 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첫 챕터  '자유의 착취' -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그는 첫 문장부터 나를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인 이 시대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스스로 즉 매우 자유롭다고 여기는 상태에서 서브젝트가 아닌 프로텍터로서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결국 자유롭게 나의 판단 아래 나에 대한 온갖 정보와 데이터를 웹에 올리며 모두가 자기 자신의 파놉티콘이 된다.  

디지털 시대의 성물인 스마트 폰의 친절한 권력은 우리를 억압하기보다는 유혹한다.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스마트 권력은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닌다. 지배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신자유주의 심리 정치는 세련된 자기 착취의 형식을 고안해낸다. 이 시대 마법의 주문인 <힐링>은

무한한 성과를 위한 자아의 최적화를 의미한다. 힐링은 완벽한 자아 착취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자발적 강제 속에서 힐링은 킬링으로 전락된다. 

사람의 인격에 무한 긍정만 있고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부정성을 내식으로 해석했다. 悲哀 旅愁 憂愁 혹은 신산한 삶에서 다가오는 어두움 그림자

그리고 부조리함....)

새로운 신앙인 다 타 이즘(데이터 지상주의)은 매우 객관적이다. 그리고 투명하다. 그러나 이 다 타 이즘은 

디지털 다다이즘이다. 맥락을 포기하고 언어의 의미조차 상실된 디지털 허무주의. 어마어마한 데이터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양화 된 자아, 즉 자아를 온갖 데이터로 분해해서 의미의 진공상태에 이르게 한다. 

수치는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아를 지탱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이야기이다.  

빅데이터는 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미시 행동을 가시화할 것이다.

디지털 무의식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는 이지점에서 디지털 심리 정치는 대중의 행동을 장악하고 조종한다는, 

니체의 ‘자연화 “ 갑작스러운, 파괴적인,... 성분이 들어있는. 이곳에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고. 예속 상태에서 해방이 되는 순간이기도 한다는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라는 문장이 다시 한번 절감된다. 

그의 글 마지막 챕터는 <백치>이다. 들뢰즈의 강연 ‘바보 노릇하기는 언제나 철학의 기능이었습니다. “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백치 상태 속에서 사유는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이탈 유일무이한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

내재성의 내재성은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는 즉 자본은 삶을 삶 자체에서 소외시키는 초월성으로 나타나는데

삶의 내재성은 이런 소외 관계를 폐기한다는 순수한 내재성은 공허라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는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의 층위는 탈 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라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이라는.....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제니 홀저) 

한병철의 시선은 눈부시다.  길지 않은 그의 글을 읽으며 맞아, 그래! 

서늘하게 나를 바라보며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선은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에게 휘둘리는가 나보다는 나 아닌 것들에 나를 주며 살고 있는가

내면의 무게보다는 허황한 것들 기분에 즉흥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직시하게 한다. 


한병철의 시선만 눈부신가.

아니 어젯밤 나뭇잎들도 참으로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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