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님(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들이 ‘나리’를 ‘나으리’ 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아시는지요? 나리라는 단순명사보다는 나으리를 경애하는 마음을 담은 뜻이겠지요. 지난 주 포천에 다녀올 때 꽤나 깊어 보이는 산자락인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혹은 누군가를 반기려는 듯, 山門 까지 나와서 그 커다란 키로 길 아래를 굽어보는 나리를 차창으로 봤어요. 할 수만 있다면 한달음에 차를 벗어나 나리와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스쳐지나가는 애달픔 때문에 감정이 증폭되었을 겁니다.
이즈음 여름 숲은 극점을 향해 치솟습니다. 오히려 팔월의 숲이 더위에 약간 무츠름 하다면 칠월의 숲은 높은 습도와 온도에 의해 세상모른 채 자신의 세력을 펼쳐 나가는 시간인 게지요.
숲이란 것이 나무의 세상만은 아니지만 여름 숲은 나무의 전횡을 용인합니다. 나무의 왕성한 자람과 성숙 앞에서 마치 씩씩하고 건장하게 자라나는 믿음직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처럼 숲은 고요한 침묵을 견지하며 나무를 향해 있습니다. 숲이 그러할진대 숲에서 자라나는 작은 생물들이야 더 그러하겠지요. 이런 비장한 독재의 침묵을 유일하게 깨뜨리는 이가 바로 ‘나으리’이십니다.
대개 꽃을 여성에 비유하지만 ‘나으리’는 드물게 남성적이지요. 나무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풀꽃들처럼 작지도 않습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 치면 나리는 작지만 견고한 뿌리를 지닌 거기다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저 동방의 기품 있는 나라, 그래서 아무리 세가 높고 덩치가 커다란 나라라 할지라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품격을 지니셨습니다. 나으리께서는 무리 짓기ㅡ무리를 지어야만 살 수 있는 우리들에게 초연함과 고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ㅡ를 거부합니다. 뿌리로 번식하는 관례에 다르면 함께 피어나야 마땅할 텐데 아주 특별한 고지대의 산을 제외하고는 거의 홀로 피어납니다.
숲 사이 무성한 나무들 틈새, 그 짙은 초록들 사이에서 선명한 주황, 날렵한 빨강, 드물긴 하지만 연보랏빛으로 나으리께서 어느 날 몸을 활짝 엽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색이 열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혹 색은 세상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게 된 고유한 입성......색은 사물의 배내옷 ...아닐까 생각해 본다는 거지요. 어쩌면 창조의 비밀을 슬쩍 엿본 이가 색일지도 모르겠어요.
무심한 듯, 자연과 동화되어 있는 초록들 사이에서 생경하게 열리는 한 송이 ‘나으리’가 피어내는 색의 향연. 전혀 다른 색이 빚어내는 부조화로움이 너무 눈부셔 숲도 잠깐 숨을 죽입니다. 나무도 멈칫거리며 바라봅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아, 하늘 나리나 하늘 말나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만,) 자기만의 생각에 깊게 잠깁니다. 제가 본 山門의 나으리처럼 정말로 누군가를 세차게 그리워하여 그만을 생각하는 그만을 기다리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나으리의 사유는 깊고 유장하여 다른 많은 사물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으리께서는 알려고 하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화려한지, 얼마나 기품 있는지, 그래서 나으리를 숲속의 莊子로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탈속한 듯, 자연과 일체라는 듯, 선과 악, 미와 추 나와 너의 구별은 무의미하다는 듯, 아내의 죽음 앞에서 대야를 두드리며 장자는 노래했다고 해요. 슬펐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되었으니 사계절의 순환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슬픔을 멈췄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는 잠언 말씀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올해 북한산에서 조우한 나으리는 여전했습니다. 가뭄 탓인지 작년보다 키는 더 작아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고요하고 우아해보였습니다. 나리는 완연한 여름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꽃이기도 합니다. 나리를 보면서 여름을 아는 것, 한해의 반이 저물어 간다는 것, 그러니 나으리는 시간을 깨닫게도 하십니다.
어둡고 깊은 칠월의 숲을 환하게 밝히는 나으리께서는 칠월 숲의 등롱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