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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16. 2020

오래된 사진 한 장

난초는 골수 도박꾼이다.

이제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그 꽃을 쉽게 난초라 불렀으나 노랑꽃창포였으리. 

어렸을 때 우리 집 화단가로 노랑꽃창포가 마구마구 피어나 있었다. 

노랑창포류는 대개 물가에서 자라나는데 왜 화단에서 크고 있었을까, 

바로 화단 옆에 있던 아가씨ㅡ기다란 머리채를 두른 펌프 샘 때문이었을 것이다.  

샘에서 쓰는 모든 물이 그 화단 곁으로 흘러갔다.  

노랑꽃창포가 피어 있는 화단가에서 두 손을 오므리고 찍은 아주 오래된 사진이 있다. 

곱실거리는 파마를 했고 그 시절 대다수 아이들과 달리 통통하고 뽀얀 것이 촌스럽기 그지없으면서도 귀엽다.  

아마도 틀림없이 입고 있는 간딴꾸는 엄마의 바느질 솜씨일 것이다.

사진은 시간의 감옥이란 말을 누군가 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야기해본다면 사진 속의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무수한 가지와 꽃 열매를 시시때때로 맺혀내고 있다.

내 어릴 때의  사진 한 장만해도 그렇다. 

아이는 사진 찍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혹은 이렇게 서라, 저렇게 해라, 

낯선 아버지의 친구 분들 앞에 서있는 것이 두려워선 지도 모른다.

그 사진은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성의 흑백 영화를 불러오곤 한다. 

현재의 나보다 훨씬 더 젊은 엄마가 장독대와 부엌을 들락거리고 아버지의 웃음과 아버지 친구 분들의 소요.

초여름 햇살, 

그리고 난데없이 마당가 귀퉁이 뒷간의 참외 모종이 등장한다. 

변소 주변으로는 거름으로 쓸 왕겨가 가득 쌓여있고 

막내인 내가 요강 대신 혹은 나무 판때기 두 장으로 놓인  높은 화장실 대신 

일을 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 참외 모종은 아마도 내가 나도 몰래 심은 것(?)이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왕겨 사이에서 자라나던 그 선명한 초록 잎사귀들......

그리고 자그마한 초록 열매가 자라고 노란색으로 천천히 변해갔다. 

그 참외를 바라보던 미묘한 마음, 더럽다는 생각과 함께 예쁘기도 했었다. 

변소 옆에서 자라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까도 생각했을 것이다.  

사진 한 장으로 비롯된  무성 영화는 내 마음대로 확장할 수도 있고 

끝없이 이어갈 수도 있는 내가 감독하는 나만의 영화 같기도 하다.  

‘아버지의 깃발’이란 영화에서도 사진 한 장이 등장한다.

이차 대전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이오지마 섬의 전투현장이다.

수라 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가 세워져 가는 아직은 다 세워지지 않는 비스듬한 깃대, 

그리고 그 깃대를 세우는 다섯 명의 군사들.

사진의 진실은 실제 정복한 뒤 성조기를 올리는 진짜 사진도 아니고 

진짜 깃발을 소유하겠다는 참모의 의견에 따라 

다른 깃발로 바꿔 세우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 한 장이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아주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다. 희망의 모습으로.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닌데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게 되는 맹점을 그 사진이 제시하였던 것이다. 

“난초는 골수 도박꾼이다” 

라는 표현은 나탈리 엔지어라는 뉴욕 타임지의 과학 기자가 쓴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이란 책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난초는 예의가 없는 꽃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식물들이 벌과 나비에게 수정을 도와주는 대신 꿀을 제공하나 난초는 인색하게도. 

꿀인 것처럼 보이는 물질을 내놓을 뿐 실제 꿀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결정적인 수정의 시기가 다가왔을 때만 그 순간에 올인한다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도박꾼다운 면모를 난초는 생식능력에 지니고 있다는 것. 

그 대신 난초는 긴 시간을 품위 있게 기다릴 줄 아는 식물이다. 

 수많은 생물들이 생식에 삶의 모든 순간을 집중한다. 

어느 나비인가는 생식을 끝낸 뒤 자신의 날개를 땅에 쳐서 죽는다고 한다. 

자신이 낳은 새끼를 위해 새로 만든 자식의 혼인집에 가서 다정하고 구슬픈 소리로 

아들의 마음을 얻어 그 젊은 아들이 자신의 새끼를 키우게 하는 새도 있다고 한다.

나 어릴 때 살던 집, 난초라 불렀던 노랑꽃 창포도 그렇게 어느 한순간에 올인했을까,

아무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어느 철에 살았다가 이제는 흔적도 없는, 

그 수많은 꽃들, 삭과들, 아니 그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연결된 채 무형의 존재가 되었을까,     

저 어린아이와 전혀 닮지 않는 중늙은이가 여전히 저 아이를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듯이.

생물과 사람의 다른 점은 생식기 간이 아닌 삶이 길다는 것에도 있지 않을까,

번식하기 위해서 자라는 시간도 유별나게 길고

번식 후에도 살아야 하는 삶이 멀고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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