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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11. 2020

<단어 채집기>

 

    

 새해가 되어서 무슨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는 생각을 할 만큼 이제 젊지 않습니다.

그래도 왠지 좀 그래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러면 스스로가 신선할 것 같아서 곰곰 궁구하다가 묵은 해 마지막 날 목표 하나를 정했어요.

사실은 수년 전부터 <메모하기>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거든요.

 잊어버리기도 하고 아, 메모! 떠오를 때도 메모장일지 필기구랄지 소소한 것들이 껄끄럽게 막아서곤 해서 결국 흐지부지 되었죠,

휴대폰 네이버 메모장에 <단어채집기>를 만들었습니다. 휴대폰은 내 몸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고 어두운 곳에서도 적을 수 있고 펜이 없어도 기록할 수 있으니 오~ 아주 괜찮네, 혼자 대견했어요,  

 몇 세기 전의 수천 년의 변화가 이즈음에는 단 며칠로 된다고 하더군요.

변화되는 속도만큼 새로운 단어와 문장이 무수히 만들어집니다.

처음에는 국어를 파괴하는 일이라며 우려의 시선도 많았지만 급박하게 변해가는 세상살이 속에서

그런 기우들은 ‘라떼 이스 홀스’가 되어 버렸어요.

이 거대한 쓰나미 속에서 단어라고 조촐한 삶을 고집할 수가 없었겠지요.

젊은이들은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수많은 조어를 만들어내고

매스컴들은 앞 다퉈서 조어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나 역시 새로운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할 때 재미있더군요.  

 전문가들 역시 질세라 알 수 없는 원어를 마치 쉬운 한글처럼 사용합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방송에 나와서 긴 시간을 토론하기에 아주 열심히 보았는데 간간히 나오는 레거시미디어라는 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거시미디어는 내 단어 채집기에 첫 등재 단어가 되었어요.

두 번째 단어는 뉴로빅스ㅡ신경세포 "뉴런(neuron)"과 유산소운동 "에어로빅스"를 합쳐 만든 낱말로 뇌운동을 말합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운동이죠.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을 두 권이나 읽으면서도 그 이름이 잘 외워지지 않아서 그냥 단어 채집기에 넣기도 했어요. 올가의 책에서도 모르는 단어가 많았어요. 메갈로그래프는 신들이나 영웅을 묘사한 글이고 로포그래프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묘사를 말함이니 나는 일종의 로포그래퍼이죠. 플랙스는 과시하다 자랑하다라는 뜻이니 쪼잔 한 플랙스너인 내가 보이고 디오더런트는 악취제거제로 가령취를 저절로 연상하게 하더군요. 플라스테네이션은 사체를 방부 처리하는 것을 말하는데 분더카머와 쿤스트카머랑 연결되는 단어였어요. 오늘 아침 신문에서도 횰로족이라는 낯선 단어가 보였습니다. 시대를 나타내는 홀로라는 단어와 욜로가 결합한 단어라니 의미가 자명해지면서도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말이 어디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살짝 우려가 스치기도 했어요. 

작가들 역시 익숙한 단어를 낯선 자리에 넣어놓고 독자들의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짓기도 하죠.

올가 토카르추크 역시 선명하게 보이는 환상통의 자리에 유령을 집어넣고 사유의 확장을 꾀하더군요.

정확한 단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한다는 정설도 이젠 옛말이 되어가는 것일까요?

새로운 조어를 무수히 만들어내면서도 옛날에 썼던 사투리를 찾아내는 일은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오마쥬이고 사라져버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일 거예요. 사투리는 공동체 안의 공감 언어로 표준어보다 훨씬 더 폭과 깊이가 큰 말이죠. 새로운 공간 하나가 주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요즈음 모 일간지에서 입말 옛말 순우리말을 채집해서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 있더군요.

그곳에 <쌍클하다>를 넣고 중복을 검색해봤어요. 다행히 없더군요.

사전에는 쌍클하다를 몹시 언짢아하여 성을 내는 기색이 있다고 해석 되어 사람의 기색에 사용하는 글로 나와 있지만 실제 전라도에서 쌍클하다는 인상 뿐 아니라 날씨에도 사용하곤 하죠.

가령 이웃집 사람이 방문 했을 때 “아따 날씨가 징하게 쌍클하요, 어서 들어오시오” 라고

그를 방안으로 맞아들이죠. 차갑고 서늘한 날씨, 뭔가 성이 잔뜩 나서 부드럽지 못한 날씨를 일컫는 거예요. 

겨울 뿐 아니라 깊은 가을, 구름 낀 서늘한 날이 겨울처럼 차가울 때도 사용할 수 있어 여러 계절에 두루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유행가를 무시하고 살아온 세월이 하 길지만 자신이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  단순한 사실들을 체감하고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어제 어딘가를 가면서 라디오를 켜니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가 흐르는데

내가 아무리 말러를 좋아하고 그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좋아하더라도

이렇게 즉물적으로 가슴이 저 아래로 푸욱 꺼지고 어깨조차 오므라들게 하면서 미묘한 감정 속으로 빠져 들게 하지는 않죠.

오래된 노랫말 속에는 세월이 켜켜이 자리 잡고 앉아서 사람을 건너다보는 것 같기도 해요.  

그것은 젊음 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림이죠.

일월이 벌써 지나가네요. 나는 벌써 꽤 많은 글자를 단어채집기 속에 넣었어요. 

 소소한 이야기를 적다가 문득 새해 당신의 목표도 궁금해집니다.     

 



<생각 많은 문성식의 그림들 국제 갤러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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