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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Feb 12. 2020

최영미의 돼지는 누구인가

돼지들에게

 

나는 시인들께 미안하지만 시집을 별로 사지 않는다. 우리 집 꽤 많은 책 중에서도 시집은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작년, 재작년인가? 최영미의 시집을 샀다. 그녀는 계란이 되어 바위를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노란 계란 대신 바위가 흘린, 아니 최영미 시인의 피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그 단단한 바위에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나는 최영미 시인에게 자주 감탄을 했다. 나는 도무지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는 축구를 그녀가 엄청 좋아하고 깊게 안다고 해서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녀의 솔직한 시세 계가 놀라웠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성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하거나 부끄러움의 대상인데 여기는 상태라.... 가끔 적나라한 그녀의 표현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사람들 보는데서 옷 속으로 손을 넣는 사람도 있었다니, 그 은 시인이 이제 철이 난 건가, 상고는 안 했다고 하니, 그의 거대한  시와 어떤 연결이 되어 있는지, 그의 아내는 어떨는지, 이제 늙음의 막바지에선 마음은 또 어떤지, 이런 말 잘못하면 혼나는 말이지만, 적어도 어느 부분 시대에 이어진 행위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시대로 면죄부를 만들 수는 없으니)    

 하여튼 그녀는 아주 새로운 시대를 위한 훌륭한 마중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것들을 뒤엎어야 되는 것이니.

사실 땅을 뒤엎는 일은 그 안의 무수한 존재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상하거나 하는 일이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을 보니 고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 숲의 미학이란 이름으로 생전의 인터뷰를 다시 적은 글을 읽었다. 

‘감옥에서 일군 신영복의 경이로운 사색.... 평생에 걸친 더불어 숲의 미학’이라는 아름다운 표제어다. 

나도 신영복 선생의 엄청난 팬이다. 그의 책을 세권이나 지니고 있고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입술에  거품 생긴지도 모르는 채 이야기할 수 있다. 그의 글은 따스하고 깊고 웅숭하다.

그 냥반은 적어도 내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기사를 읽다가 

‘교도소는 가진 자들의 질서와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곳’이라는 문장에 멈칫했다.  

사회의 모순을 담고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특히 그 시대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지만,  

(시대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은 내가 늙어서이기도 하고 시대가 실제로 달라져서이기도 할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더욱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또 서성거려야 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비유이고 뜻깊어 보이는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팩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나무는 수목 생리학면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저 견딘다... 고 나무학자들은 말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기쁨과 슬픔의 근원이다. 양심도 타인에 대한 고려다’ 

이 대목에서는  최영미 시인이 저절로 생각났다.    


다음은 최영미 시인의 시 두 편이다.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그는 모른다/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외딴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언제 어디서 였는지 나는 잊었다/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우연히 만난 돼지에게(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나는 그가 돼지 인지도 몰랐다/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나는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슴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꺾었다/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되었다/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속이 빈 가짜 진주 목걸이로 그를 속였다/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나는 도망쳤다/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그래도 그 탐욕스러운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돼지들에게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그는 여우가 되었다//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사람들이 높이 쳐다보면서/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머리칼을 쓸어 넘긴다/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돼지의 변신    

     

돼지들에게 라는 시에서 주제어 진주를 그냥 진주로 생각하며 읽으면 굉장히 서정적인 서사시이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진주가 있다는, 그 진주를 무도한 자들이 훔친다는, 연약한 사람들은 뺏긴다는, 뺏길 수밖에 없다는, 진주를 뺏으러 와서 무도하게 파티를 하는, 여린 봉선화 가지를 꺾는, 그 와중에 돼지는 잔인한 늑대와 교할 한 여우가 된다. 다양한 모습으로 읽히는 서정시다. 피곤하고 지친 오후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성경 속의 진주도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 어느 때는 말씀과 예수님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주가 시인의 몸이 되면 시는 더욱 격렬해지고 사나워져 서정이 사라져 버린다.

사실 시인의 몸이라는 치환은 너무 쉬어서 과연 시인이 자신의 몸을 진주라 표현했을까 의심이 가기도 한다. 

 

돼지의 변신을 보면, 누굴까, 하다가 저절로 어느 사람이 떠오르게 되어 있다.

감방에서 이십년 이라는, 시가 풍자고 은유고 비유랄지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현실을 꼭 찾는다.     

 아주 오래전에 북클럽 누구에게 선가 최영미 시인의 시속 돼지가 누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 진짜?를 연발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라는 단어 속에는 아주 강렬한 호기심이 숨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리고 유치한 태가 나 대신 앞선다.

소녀의 호기심으로 변장은 했지만 냄새나는 돼지든, 잔인한 늑대든, 교활한 여우가 되어버린다.

난데없이 천박하기 그지없는 이해력과 상상력이 증폭되기 시작한다. 

아 그 훌륭한 냥반도 사랑에 빠지는구나, 그리고 비겁했구나,

키 크고 늘씬한, 자신보다 훨씬 더 젊은 시인, 그녀는 너무 솔직하게 시를 써서 경이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인은 특이하게도 축구광이다. 거기다 독신이니, 나이 든 학자, 감옥 속에서 극한의 외로움을 지성으로 견딘 남자 눈에 얼마나 신선해 보였을까, 둘은 아마 첫눈에 반했을 거야, 사랑에 눈멀다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리게 되니  하늘의 선비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길을 생각하게 된 거지, 사랑은 마약 같아서  벗어나면 두려운 마약이 되는 거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채비를 하니 돌아갈 곳이 없는 자유로운 그녀의 눈에는 냄새나는 돼지로 화했겠지. 물론 혼자 쓴 소설이다.

 

이런 소문을 바탕으로 미디어펜에 올라온 칼럼을

최영미 시인에 대한 왜곡기사로

언론 중재위는 삭제하고 정정 보도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며칠 전 '돼지들에게'(이미 출판사) 개정증보판 출간을 기념해 연 기자 간담회 최 시인은 돼지에 대해 밝혔다.  "2005년, 그 전쯤에 어떤 문화예술계 사람‘ "문화예술계에서 권력이 있고 한 자리를 차지한 인사",

"승용차와 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온 사람" 등으로 묘사했다.


 변방의 철학을 설파한 신영복 선생, 여전히 변방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최 시인. 

그의  ’ 돼지들에게'(이미 출판사) 가정 증보판이 재재 재재 재재판을 찍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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