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Feb 05. 2020

비행기보다 무궁화호

고한에서

  


 그대는 좀 생경할 수 있겠군요. ‘여행=글이라는 제 공식이 말이죠. 

난데없는 연결로 여길 수 있겠지만 내겐 한 자릿수 더하기처럼 선명해요. 

가끔 오래전 여행을 다녀와서 쓴 글을 보면 전혀 새로운 나와 새로운 여행지가 거기 있어요. 

분명 난데 내가 아닌 나를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수년 전에 다녀왔던 구채구를 다시 내 글 속에서 만날 때 

그 놀라운 물의 장관이 제 방 책상 앞에서 선명히 펼쳐지더군요. 정말 물의 세상이었지요. 

유명한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사라지고 풍경만 그득했어요. 

여기가 그랬던가? 거기서 그런 생각을 했던가? 

글을 읽으며 약간 쑥스러우면서도 영롱한 기쁨 같은 게 솟아나더군요. 

영롱한 기쁨을 그리움으로 바꿔 읽으셔도 돼요. 

돈 안 드는 새로운 여행을 내 글 속에서 다시 더 깊게 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겨울은 그 어느 계절보다 솔직한 시간입니다. 

나무들은 회초리가 되어 산의 갈기로 자리 잡고 

산그리메는 산의 갈기로 인하여 더욱 선명해져 있어요. 

푸나무들에 가려있던 산속 바위들도 앞으로 성큼 나와 있네요. 

들판은 어떻고요. 지나 간 해의 농사 자국을 품에 안고 느긋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죠. 

부지런한 농부가 주인이라면 벌써 논밭을 갈아엎어 저 안에 있던 속을 거뭇하게 드러내고 있기도 해요. 

그러다가 동네 어귀의 커다란 당산나무.... 아마도 느티나무가 틀림없을 거대한 나무가 굵고 가느다란 가지를 한껏 드러낸 채 서있어 봐요. 

한그루지만 그 수많은 가지들로 이루어진, 휘기도 하고 곧기도 한 크거나 작은 무수한 가지들을 선명하게 드러낸 채 선비처럼 꼿꼿하게 서있죠. 

당당하고 솔직해 보이는 그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요. 

 비행기를 타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죠. 

비행기야 하늘 위 구름이거나 저 아래 바다의 작은 배는 잘 보이지도 않아요.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할 때 그리고 날아오를 때면 언제나 죽음을 생각해요. 

이대로 사고가 나서 죽는다면.... 그러니 약간의 공포와 함께 여행은 시작되죠. 

KTX를 타도 너무나 빨리 달려서 풍경을 눈에 담기도 전 스쳐 지나가버려요. 

그렇지만 무궁화호는 달라요.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생각할 만큼 스쳐 지나가요. 

무궁화호에 앉아서 하는 차창 투어는 그 느릿함과 안온함이 고급스럽기 이를 데 없어요. 

무궁화호, 기차 중에서 가장 값싼 기차에서 무슨 고급스러움을? 

설마 그대는 고급스러움이 돈의 경중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겠죠? 

 이름 모를 역에 기차가 서요. 요즈음은 시골이라도 역 주변으로는 아파트 건물이 숙숙 솟아오기도 하는데 강원도는 좀 다르죠. 

빨간 옷을 입은 자그마한 아이와 엄마가 차에서 내려요. 

엄마 앞서 팔짝팔짝 뛰며 걷는 아이 얼굴이 환하네요. 

저 귀여운 얼굴을 볼 생각에 아침부터 서둘렀을 할머니 할아버지도 생각나는군요. 

맛있는 고구마를 구워 놓았을지도 몰라요. 알맞게 익은 동치미도 가지런히 썰어 놓았을 거예요.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기차는 멈추기도 하죠. 

그리고 가만히 기다려요. 누군가 기차 안으로 들어서길, 물론 저두 함께 기다리죠. 

오래된 겨울나무들과 사철나무로 휩싸인 경계를 지나 펼쳐질 다른 동네들을 상상하며 말이죠. 아무도 타지 않아도 좋아, 기다릴 만큼 기다리다가 스르륵 다시 움직이죠. 

기차 안의 누구도 급하지 않아요.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죠. 

낯 섬과 새로운 풍경만이 여행이 아니죠. 

익숙하고 편안한 풍경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여정이죠. 

풍경이 조금 지루해지면 음악을 듣기도 해요. 

핸드폰에 심어놓은 콩에서는 아무 때나 FM 음악이 흐르곤 하죠. 

담아 온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커피가루 조금 넣으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커피가 되기도 해요. 물론 좋아하는 귤도 담았어요.    

 눈을 찾아 나선 길이에요. 겨울의 한 여정이 되어 있네요.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 눈이 하도 안 와서 강원도 날씨 예보를 보고 떠나는 거요. 

태백과 정선 추전을 갔었는데..... 

이번에는 민둥산역에 전화를 해봤더니 눈이 없다고 하더군요. 

고한에는 눈이 있을 거라고 해서 고한 역 표를 끊고 검색을 해봤죠. 

오래된 탄광도시 그리고 가까운 곳에 만항재가 있었어요. 

만항재는 들꽃을 가득 심어 천상의 환원처럼 보이던 곳이죠.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라 함백산 트래킹을 갔었는데 

버스는 하루에 두 번만 다녀서 할 수 없이 택시를 탔어요. 

수려한 자태로 키 큰 나무들이 곧게 서있더군요. 

그리고 들꽃들이 가득 피어있던 곳에는 두툼한 목화솜 같은 눈 이불이 가득 덮여 있었어요. 

하얀 눈을 보니 마치 막혔던 재채기가 터져 나온 것처럼 시원했어요. 

혼자 여기저기를 걷다가 사진도 찍다가 먼데 산그리메도 바라보다가 아랫마을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왔어요.

 새로 준설한 풍력발전기가 산 위에 여러 그루 서있었는데 그 소리ㅡ괴이해요, 모골이 송연해져요. 거대한 쇠막대기가 바람을 아니 지구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해요. 잔혹한 소리예요. 무서워요. 

다리가 아파질 때쯤 택시를 불렀어요. 그리고 삼탄 아트마인에 내려 달랬죠. 함백산 중턱에 자리 잡은 이 탄광에서는 2001년까지 38년간 3천 명의 광부가 약 3천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대요. 삼탄 탄광을 거의 그대로 현장 보존하여 만든  삼탄 아트마인,  탄광이 번성할 무렵 아이들이 바글바글해서 오전반 오후반 수업을 해도 부족해서 교실이 콩나물시루였다고.... 기사님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탄광의 먼지 위에 내려앉은 세월의 먼지들이 보이던 곳이더군요. 

카페 앞으로는 거대한 권양기가 산처럼 산 앞에 서있고 

산을 마주한 자리에서 커피 한 잔을 아주 길게 마셨어요.   

  해 저물 무렵인데 고한역으로 올라오는 길 지붕에 고드름이 맺혀 있어요.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더군요. 

각시방 영창이라ㅡ 조그마하고 사랑스러운 각시방에 어울리는 고드름이라는 뜻일까요? 

아직 각시라 여린 소녀의 마음이 있어 고드름을 보면서 감탄할 거라는? 

꽃 없는 겨울에 꽃 대신 고드름으로 사랑을 고백하라는 뜻? 

아, 군인 감옥을 영창이라고도 하는데 혹시 각시방도 감옥이? 혼자 웃기도 하죠.  

 다시 무궁화호를 타고 고한을 떠납니다. 무궁화호는 가끔 역 아닌 곳에 멈추기도 해요. 

빨리 가야 하는 차를 위해서 비켜주는 거죠. 

친절하고 배려 넘치는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요. 

아 폐가가 저기 있네요.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집이었을 텐데요. 

무궁화호는 작은 개울과 함께 가기도 하죠. 

거대한 폭포도 휘몰아치는 파도도 좋지만 

저리 맑은 물 흐르는 시냇물에는 빨래하기 좋아하는 아주 어린 소녀가 있어요.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 차창, 

졸기에 더없이 좋은 흔들거림을 느끼며 가수면 상태로 서서히 들어갔어요. 

그러다가 눈을 뜨니 용산역이네요.

 <비행기 보다 무궁화호> 제 글 제목이 맞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