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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10. 2020

저 멀리 바라보면

라떼스러운 글

    강화의 아주 오래된 예배당 학교로도 사용했던 곳, 지붕의  복자가 애잔했다




바둑, 말이다. 슈퍼컴으로 아무리 수 계산을 해도 다 나타낼 수가 없다더라.

 겨우 19개의 가로세로 줄이 만들어내는 기반 위의 세상이 그러는데 사람이야 오죽할까, 

그래서 데카르트도 수많은 생각 끝에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사실 겨우 한 줄을 건졌나 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은유의 폭이 깊긴 하지만, 

이렇게 꽤 많이 살았는데도 여전히 <사람>을 모르겠어.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판단이나 충고라면 더더욱,

 설령 아주 똑같은 경우를 경험했다손 치더라도

 그것 역시 상황이나 성격, 그 접근에 따라 전혀 다른 결말이 펼쳐질 테니. 

그래서 내가 말했지. 네가 이야기한다면 듣기는 하지만 나한테 어떤 판단을 바라지는 말라고. 

너는 말하고 나는 듣다 보면 네 머릿속에 어떤 정돈된 길 하나 보일 수도 있겠지. 

물론 원하는 답과 현실의 답이 다를 확률은 높지, 그러면 거기서 조금 좁혀 보고…….

 약속대로 듣기만 해서 너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복기해보는 거야.

네게서 들은 무수한 스토리들은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로 모개흥정이 되더라. 

그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소유부터가 이해 불가였어. 내겐 잘 셈이 안되는 엄청난 부자라서 말이지, 

그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도 끝없는 돈에 대한 갈증이라니,

 네 명의 자식들에게 건물을 하나씩 남겨주는 것이 생의 목표라니,

 최고의 대학을 나온 의사에 관한 이야긴데도 이상하게 조폭이 떠올랐어. 

가진 거라고는 힘 외엔 없어서 폭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에 대한 도리가 없고 배움에 대한 기본예절도 없는 상태라면 폭력배와 뭐가 다르겠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너는 그래도 동생 문제라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것들은 관념에 불과해서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거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너는 그들에게 휘둘리고 상처 입고 있는 거잖아, 

도와주고 도움받던 부분들은 없어져 버렸고 특별히 애틋한 관계도 사라져버리고 그래서 잠도 못 자며 매시간을 생각한다는 거지, 


父子가 소를 몰며 밭을 가는데 아버지 고랑은 반듯하고 아들 고랑은 꾸불거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해, 얘야, 밭을 갈 때 앞을 보지 말고 멀리 보렴. 

단순한 이야기지만 함축하고 있는 뜻이 많은 인상적인 예화야.

 단순히 밭에 이랑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라는 길을 살아갈 때 아주 적절한 방법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앞이 아닌 멀리는 객관을 뜻하는 거지. 통찰을 안고 있으며 다른 일로 시선을 돌려 쉬게도 하지,

 자신의 비참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보다 더 비참한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쇼펜하워가 말했어.

 예전엔 얼핏 수준 낮은 방법 아닌가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상처가 쓰리고 아프면 수준이 무슨 필요가 있어. 

자연을 바라보며 치유하듯이 나보다 고통스러운 사람의 삶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을 때도 있는 거지, 

 나라면 그들을 생각하는 시간에 죽음을 생각할 것 같아. 

이 죽음이란 낯설면서도 생경한 친구는 부르면 다정하게 다가와서 내 고개를 살짝 들어 멀리 바라보게 하는 거야. 

지금 여기 말고 저기 조금 멀리 보렴, 한 발짝만 떨어져 생각하렴. 니가 천년만년 살겠니. 속삭이는 거지. 

시간은 흘러. 어제도 벌써 흘러가 버렸어.

 지금도 여전히 흘러가서 손에 담은 물 같기도 해, 시간.  

깊은 밤이 되어서 읽다 만 책을 펼쳤어. 

젊을 때의 작가가 지닌 유장한 문장과 사고력이 잘 안 보여서 실망하며 읽어가던 책이었어.

 사랑이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고 일상처럼 자꾸 스쳐 지나가길래 그게 나이 든 사람이 바라보는 사랑에 대한 담론인가,

 작가가 나이 들면 소설 속 사랑도 나이들 수밖에 없는 건가, 그만 읽자 하다가 작가의 후기를 읽었어. 

책의 서언이나 후기는 책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지만, 방향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 

피와 땅에 바탕을 두는 정체성의 무의미함, 예술의 보편성 또는 노마드 적 성격에 대한 짧은 성찰 들을 주제로 하는 소품으로 읽어주라는,

 문득 그 짧은 문장이 반짝이더라. 

그는 소품을 썼고 나는 소품이라는 그의 글을 읽으며 원대한 서사를 기대했던 거야.

 베토벤이라고 맨날 운명 같은 교향악만 썼겠니. 엘리제를 위하여도 있고 크로이체르 소나타도 있잖아. 


적확한 인생의 답 하나가 있다면 우리 모두 죽는 것이야. 

태어남에서 시작되고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지극한 공평, 

공평해서 아름답고 공평해서 단호하고 공평해서 무섭기도 하지.

 내 신앙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일 거야. 

좀 더 정확히 말해본다면 죽음을 현실로 가까이 가져오는 힘, 

즉 죽음을 <나의 것으로 해보는 힘>이라고나 할까,

 말로는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꽤 많은 시간(행동)과 무수히 반복된 기도, 사유 속에서 얻어진 결과물이야. 

잠언 기자는 단호하게 선언했지.

 ‘죽음과 멸망이 만족함을 모르듯이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속에 깃든 욕심에 대한 무서운 선언도 이어지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삶의 욕심을 줄여주는 지혜로운 스승이고 삶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일이지. 

몽골인들의 평균 시력은 3.0이라고 하더라. 멀리 있는 목축을 지키기 위해서 항시 눈을 멀리 봐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갓 낳은 아이를 석주 동안 어두운 곳에서 키우며 연약한 망막을 보호해서 그랬을 거라고도 추측하더군. 

눈도 좋아지겠네. 

눈앞에 있는 그들을 보지 않고 시선을 거두어서 저 멀리 바라보면,

 그게 익숙하지 않으면 나무 한 그루를 정해서 자세히 보는 것도 괜찮지,

 요즈음 나뭇잎들 아래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벌레들이 얼마나 많은지. 

볼 것이, 봐야 할 것이, 안 보면 섭섭할 것이 너무 많은데.

그나저나 라떼스러운 이글을 너한테 보내야 할까? 

강화도 사기리의 400년 된 탱자나무 강화갈 때마다 애인 만나듯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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