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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25. 2020

연두를 데리고 녹음 속으로




자유로를 달린다. 좋다. 하늘이 그 어디에서보다 광활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시에 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늘은 거의 가려져 있어

‘손바닥만 한 하늘’이라는 말이 안 되는 표현이 맞다.

어디서든 내 키보다 훨씬 더 높은 건물들이 가리고 있으니 하늘을, 도무지 광활한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다.

여자건 남자건 이 안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호연지기(안개가 금방 사라질 거라는)를 길러야 할 텐데

그리고 호연지기를 길러줄 가장 아름다운 교사는 광활한 하늘인데ㅡ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교사가 아닌가ㅡ

손바닥만 한 찢겨진 하늘만 보고 살아가니 우리에게 호연지기가 있을 수 없다.  

 

 자유로를 조금 달리다 보면 출판도시가 나타나고 조금 더 가면 예술인 마을 헤이리가 있다.

구획화된 도시들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곳에 아파트는 보이지 않고 집들은 제각각의 모양으로 저마다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눈은 충분히 쉴 수 있다.     

사실 도시의 아파트들은 우리에게 편안한 쉼터를 제공하고 우리가 사는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 자연으로 향하는 시선을 가리는 거대한 벽이다.

하늘의 근간인 광활함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뿐더러 저녁에 걸어도 달이 보이지 않기 일쑤다.

 날이 아주 맑아서 별이 보이는 날이라 할지라도 겨우 몇 개정도 볼 수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하늘을 보지 않으면 우리가 어디서 마음이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밤하늘의 그 수많은 결들, 그 색들, 구름이 끼거나 끼지 않거나 어디론가 끝없이 흐르는 하늘들,

 그런 하늘을 보지 않고 우리가 무슨 마음 넓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인가,  


 출판도시는 생태도시를 표방하고 있어 작은 천도 여기저기 흐른다. 이렇게 수많은 건물을 지어대면서도 생태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정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 배려가 있으니 그래도 귀하다. 


그중에 중심적인 건물 지혜의 숲에는 사다리 없이는 만질 엄두도 낼 수 없는 책들이 벽마다 가득 꽂혀 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책의 장식’이라고나 할까, 빌려볼 수 없는 책이면 어떤가,

책들은 이미 그 자체로 저자의 엄청난 생각, 고통과 정리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 가득 고여 있는데,

그러니 책은 이미 어떤 아름다운 장식이나 벽지, 인테리어보다 우선한 인테리어라는 말도 된다.  

   

 그 건물 한쪽은 川에 다리를 드리우고 있어서 비가 내린 후에 가면 찰랑거리는 물과 붉어져 가는 쇠다리가 기막히게 어울리는 풍광을 연출해낸다. 그 위에 카페가 있다. 그곳에서 윤슬ㅡ빛남과 움직임이 함께 들어 있는  이 단어 참 예쁘다ㅡ과 함께 오월의 나무들이 바람에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면 저절로 탄성이 발해진다. 

이제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은 아니다. 뷰와 시간과  우리네 집들에는 없는 넓음과 천정 높음을 산다고 해야 맞다. 지나치게 면밀하게 자신을 바라는 것도 피곤한 일이니 그런 곳에 앉아서 그냥 풍경과 커피와 그리고 수다에 취하는 일도 이 풍진 세상을 견뎌내는 일일 것이다.  

   

 출판도시 끄트머리에 있는 명필름 아트에서 시네토크를 한다. 

‘잡식가족의 딜레마’ 라는 다큐다. 이런 영화를 보고서 마음 편할 사람은 없다. 골치 아플텐데...하면서 가는 마음을 ‘내 식의 정의’ 라고나 해두자. 정의라고 해서 꼭 거대하고 원대해서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사람의 얼굴 다르듯 정의의 크기도 다르다.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천은 못해도 이제 비웃지는 않을 거야, 결심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 과정 중에서 옳고 그르다도 없고 크다 작다도 없다는 것, 

이런 영화를 다는 아니더라도 많이 섭렵하고 책도 읽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생태주의자가 되었는데 행함도 없고 목소리도 작은 그저 걱정만이 가득 찬 비겁한 생태주의자다. 혼자 속으로 공시랑 거리는, 


소다수 밀크셰이크 샐러드드레싱 치킨너겟 치즈버거 속에 상당히 많은 양의 옥수수가 들어있다. 패스트푸드 냉동식품 청량음료에는 기본적으로 옥수수가 들어있다고 한다. 옥수수를 왜 그렇게 많이 키울까, 옥수수는 자신을 풀어서 소고기를 만든다. 소고기 돼지고기....텔레비젼을 트니 음식 만드는 프로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아, 음식의 답은 고기지요. 고기가 맛있고 고기라면 거의 모든 음식이 맛있다는 말이다. 소금 살짝 넣어서 도톰하게 구운 고기를 입에 넣을 때 피와 함께 지방 단백질이 어우러지는 맛을 나도 안다. 그리고 엄청 좋아한다. 옥수수를 사료로 쓰기 위해서 아마존 밀림을 베어내고  아마존이 황폐화 되면 인류는 저절로 멸망할 것이다. 그전에 소들이 뿜어내는 메탄가스에 의해 구멍이 뿡 뜷린 지구에서 햇살 때문에 더 일찍 죽을 수도 없다. 어쩌면 점점 언택트화 되는 사회에서 외로움에 질려 죽을 수도 있다. (뻥이긴 하다)  


살처분 한다는 말을 신문에서나 티비에서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남의 일이다가 영화 속 한 장면 돼지의 시선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과연 고기를 먹어도 되는 건가,   


세상에 공평은 없다. 사람들 뿐 아니라 동식물 모든 세상에서 공평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사과밭에서 사과를 따듯이 공평을 금방 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공평보다는 차라리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더 공평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동물을 먹어도 된다. 어쩔수 없다. 죽여도 된다.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살처분 해도 된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풍진 세상은 점점 섬세해져 간다. 성적 소수자에 대해 한마디라도 했다면 큰일 나고 고양이나 개에 대해서 동물이라고 하면 무식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서도 섬세하디 섬세한 우리는 돼지를 거세시켜서 먹고

(자연 친화적으로 돼지를 키우는 집에서도 돼지를 거세했는데 수놈을 거세하지 않으면 고기로 팔수 없으니까, 어린 새끼를 주인이 거세하기 위하여 데리고 나오자 다른 새끼들을 지푸라기 아래에 숨기는데.....돼지의 사랑에 눈물 났다) 작은 케이지에 돼지를 제품화 시켜서 먹고 

송아지가 먹어야할 소젖을 뺏어서 먹고 살이 디룩디룩 찌게 만들어서 고기로 먹는다. .

그런데 티비에서 프라이드 치킨을 선전할 때 마다 나는 그 치킨이 먹고 싶다.

치킨은 닭이 아닌가, 수평아리는 갈아서 사료로 쓰고 잠도 재우지 않고 사료를 줘서 알을 낳게 하고 며칠 만에 살이 디룩디룩 지게 만들어버리는 닭은 치킨과 다르나.....

열매를 먹고 상치를 먹고 뿌리를 먹고...

물만 먹고 열심히 자라나는 그 가느다란 무순도 어머 알싸해...난 무순이 좋아 하면서 먹는다. 



 오후에는 정발산을 걸었는데 그제와는 또 다른 향기가 풍겨왔다. 곰곰 생각해보니ㅡ생각은 거의 모두가 기억이나 추억이다ㅡ그제는 없던 쥐똥나무 향기가 더해진 것 같았다.

나는 가끔 내가 쥐똥나무 같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는데

쥐똥나무 이파리나 생김새는 참으로 보암직하질 않아서 늙은 나 같은데

그 향기만큼은 요즘 만개한 장미? 흥칮뿡이다.

장미 향기가 난분분 날아다닌다면

쥐똥나무 향기는 우아한 모습으로 한결같은 자태를 지닌 채 살며시 다가온다.

 볼품없지만 향기 있는 존재,  아, 이게 더 어려울 수 있겠다.


오월이 저만큼 가고 있다.

연두를 데리고 녹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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